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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날에 만나는 그리너리 향수 3

안녕. 난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전아론이다. 요즘 새로운 향들이 참 많이 나와서 코가 바쁜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데…. 재미있게도...
안녕. 난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전아론이다. 요즘 새로운 향들이 참…

2021. 12. 01

안녕. 난 글 쓰고 향 만드는 사람 전아론이다. 요즘 새로운 향들이 참 많이 나와서 코가 바쁜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데…. 재미있게도 추운 계절에 맞지 않을 법한 그리너리한 향수들이 꽤 많이 눈에 띄더라.

뒤늦은 고백이지만 나는 그린처돌이(!)라서, 조향할 때도 그린 노트에 자꾸만 집착하곤 한다(심지어 내가 만든 무화과 향에는 무화과 껍질 내음이 포인트로, 굉장히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다). 추위고 뭐고 나는 초록의 향기 세계로 떠나겠어! 하는 마음으로 새로 나온 향수들 세 개를 골라보았다. 여러분은 칙칙하고 서늘한 겨울에 파릇파릇한 향을 뿌리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아직 모를 테지? 좋아, 이제 내가 알려드리겠다(?).


신테틱 정글, 프레데릭 말 
그린함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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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년 만에 출시된 프레데릭 말의 새로운 향수. 신테틱 정글을 직역하면 ‘인조 정글’쯤 되려나. 인조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가짜의 기운이 풍긴다. 하지만 프레데릭 말이 그 단어를 선택했을 때는 오히려 진짜에 가까운 가짜 혹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진짜를 만들겠다는 자신감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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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향은 코 끝이 맵싸할 정도로 짙은 풀 내음이 난다. 진한 초록색의 잎사귀를 손으로 짓이긴 듯한 느낌의 스파이시 그린 노트! 강렬하면서도 알싸한 그린 향료인 갈바넘을 선두로 세운 모양. 완전 내 취향이다. 거기에 바질을 비롯한 허브 향이 신선함을, 블랙 커런트의 향이 멋스러운 달콤함을 더한다. 거대한 풀과 나무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곳곳에 열매가 열린 정글에 막 들어서면 이런 향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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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향이 마냥 거칠지만은 않은 건, 곧바로 따라붙는 각양각색의 꽃향기들 덕분이다. 촉촉한 물기를 더하며 뾰족한 풀냄새들을 잠재우는 은방울꽃(뮤게)과 장미, 그린 노트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발향력을 가진 히아신스, 무게감을 더해주는 화이트 플로럴까지. 정글의 그린함을 돋보이게 해 줄 플로럴 노트들을 정말 잘 골라서 배치했다. 덕분에 향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더욱 강렬하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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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향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를 한참. 두어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풀 내음이나 꽃향기들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걸 보면 정글의 생명력까지 담았나 싶을 정도다. 향수를 뿌린 걸 잊을 때쯤에야 이끼향을 닮은 잔향이 천천히 느껴진다. 이 향기가 새하얀 눈과 만났을 때를 상상하고 있다. 서로 부딪히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어떨까. 분명, 너무 아름다울 것 같다.


코르푸, 메모 파리 
그린함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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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린 계열은 아니다. 하지만 이 향수가 그리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른걸! 시트러스와 아로마틱 한 그린 노트, 그리고 특색 있는 프루티와 머스크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조화랄까. 그리스에 위치한 코르푸 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향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도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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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 직후에는 자몽, 오렌지 등 시트러스의 쌉쌀함이 살짝 느껴진다. 그리고 나면 달콤하면서도 그린한 느낌을 내는 프루티 계열 향들이 탑노트의 주인공을 차지한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루바브, 그리고 블랙커런트의 향이다. 유치하지 않게 잘 조율한 프루티 노트들에 슬쩍 풀내음을 섞으니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 이런 향을, 맡아본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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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달콤함은 장미, 제라늄 같은 꽃향기와 뒤섞이며 조금씩 이미지를 달리한다. 그린 노트는 배경으로 빠지고 복숭아 같기도 하고 라즈베리 같기도 한, 예쁘장한 달콤함으로 변신한달까. 아니, 이게 과일 향으로 빠지나!? 싶은 순간 바로 방향 틀어버리는 이 향수. 트레일(향의 흐름)만 보면 거의 변신 로봇급이다.

앞선 향들은 뒤엉키고 있는데 무게감은 한결 가벼워지고, 은은하게 밀키한 나무 내음이 깔린다. 바다를 앞에 두고 마시는 과일 칵테일 같기도 하고, 외국 휴양지에서 맡는 여름 냄새 같기도 하고. 분명 가벼운데 부드럽고, 푸르른데 따뜻하다. 가만 보니 이 향수, 기억을 미화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우중충한 실내 인간으로 지내야 하는 겨울 내내 이 향기의 품으로 종종 도망쳐야겠다.


포레스트, 논픽션
그린함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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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핫하디 핫한 논픽션에서 새로운 향을 론칭한다는 얘길 접했을 때, 부러움과 궁금함이 반반 뒤섞인 마음이 들었다. ‘포레스트? 사람들이 좋아하는 숲 콘셉트인가?’ 했더니 Forest가 아니라 For rest란다. 그래서 그린하다기보다는 그린 뒤에 오는 잔잔한 나무 내음이 돋보이는 향이다.

첫 향부터 히노키의 드라이한 나무 내음이 강하게 퍼진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향나무의 느낌을 받기도 했다. 뭔가 한국적으로 홀리(holy)한 향이랄까. 유자를 닮은 시트러스는 탑노트에서 슬쩍 모습을 비추고 유유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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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페퍼와 넛맥의 스파이시한 노트가 포인트를 준다. 배경으로는 깔린 것은, 의외로 친숙한 장미 향. 덕분에 우디 향이 너무 무겁지 않게 잡아주며, 편안한 무드를 만든다. 히노키 같은 드라이한 우디는 자칫 잘못하면 너무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데, 발삼 노트를 사용하여 그 부분을 잘 잡아줬다. 아무래도 휴식을 위한 향이라면 느긋하고 따스한 쪽이 더 어울리니까.

잔향을 담당하는 프랑킨센스는 유향 나무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향료다. 탑노트에서 내가 느꼈던 홀리한 포인트가 바로 이 잔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였다니! 고대에서부터 이어져왔을 것만 같은, 깊은 안정감을 주는 나무 향인데 그래서인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오래된 가구가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휴식을 위한 향이라더니 정말 마음의 평온에 포커싱해서 만들었구나. 오늘 밤 요가 타임에 적격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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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향을 만나는 건 늘 즐겁고 짜릿한 일이다. 사람들은 점점 향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쉽게 고정관념에 휩싸이는 것 같기도 하다. 성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직업에 따라, ‘이 향은 나랑 안 어울릴 거야’라며 단순하게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경험의 면에서 향은 맛과 같다. 음식은 먹어봐야 아는 것처럼, 향도 맡아봐야 안다. 그러니 더 많은 향들을 접하고 겪어보시라. 더 자주 실패하고 당황하시라. 그럴수록 각자가 가진 향의 세계는 넓어지고, 내 마음에 꼭 맞는 향이 하나 둘 늘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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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그린한 향도 슬며시 놓고 간다. 비터 오렌지 나무의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만든 패티 그레인 향을 중심으로 한 ‘오렌지 그린우드’다. 쌉싸래한 나뭇잎 내음으로 시작해, 비터 오렌지, 오렌지 블로썸을 지나 패출리의 이끼 향으로 마무리된다. 시린 겨울의 우울함을 떨칠, 오렌지 숲으로 데려다줄 향이라고 기억해 주시길. (찡긋)

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