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처음부터 원래 그런 건 없어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1. 10. 12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쓴다. (얼마 전부터는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든다.)

이번에는 별생각 없이 스쳐지나갔던 순간들을 돌아볼 수 있는 책 5권을 꼽아봤다.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그전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의 일도, 우리의 대화도, 우리를 둘러싼 공기도 ‘처음부터 원래 그랬던 것’은 없다.


[1]
<불쉿 잡>

“뱀파이어, 좀비, 늑대인간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무서운 것은 당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위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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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 첫째, 돈을 얻는다.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든, 건별로 정산을 받든. 둘째, 의미를 얻는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자기효능감, 사회에 기여한다는 뿌듯함, 일 자체에서 얻는 성취감과 재미 등을 모두 ‘의미’로 묶었다. 의미와 돈 모두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일은 극히 소수다. ‘열정 페이’는 의미를 핑계로 돈을 매우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주는 경우를 가리킨다. 정반대로, 돈은 받지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업무를 지속해야 하는 경우를 ‘불쉿 잡’이라 부른다.

불쉿 잡 종사자들은 본인 스스로 그 일이 무의미하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기업 변호사, 텔레마케터, 로비스트, 홍보 전문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본인 일의 ‘불쉿스러움’을 저자에게 제보했다. 무의미하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아직 감이 잘 안 온다면 저자가 분류한 불쉿 잡의 5가지 유형을 보자. 제복 입은 하인, 깡패, 임시 땜질꾼,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작업반장. 각 유형의 특징을 듣다 보면 직장에서 목격한(혹은 직접 경험한) 어느 순간이 떠오를 것이다.

불쉿 잡은 빠르게 늘고 있고, 지금도 충분히 많다. 풀타임 직업을 가진 영국인에게 ‘당신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전혀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37%에 달했다. 이 수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저자가 책을 쓴 의도이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것은 특정한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문제에 관한 책, 거의 모든 사람이 존재하는지 깨닫지도 못하는 문제에 관한 책이다.”

  • <불쉿 잡> 데이비드 그레이버 | 민음사 | 22,000원

[2]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기체를 뜻하는 가스란 단어는 카오스에서 유래했다.
고대 신화에서 카오스는 심지어 신조차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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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에서 너무 재밌는 책을 읽으면 부작용이 있다.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도 책을 덮기가 싫어서, 일에 집중하기까지 평소보다 로딩시간이 길어진다. 덮기 싫은 책은 오랜만이었다. 여러 가지 원소들의 화학작용과 복잡한 과학 원리가 대거 등장하는데도 그랬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도 쉽고 재밌게 풀어주는 저자의 능력 덕분이다.

책 제목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이 책의 매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지만, 역사 속 주인공을 굳이 제목에 넣은 이유는 알 것 같다. 이건 과학책이라기보다는 역사책에 가깝다. ‘공기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은,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여러 종류의 기체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밝혀내면서부터다. 이 책의 주인공을 굳이 꼽자면 ‘공기’겠지만, 씬 스틸러는 공기에 다양한 이름을 붙여준 과학자들이다.

발견 초기, 기체들은 대부분 골칫덩어리였다. 너무 쉽게 반응해서, 너무 반응성이 떨어져서. 너무 무거워서, 너무 가벼워서.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이 ‘골치아픈’ 특성을 이용해 다양한 기체들의 포텐을 터뜨렸고, 공기의 역사는 곧 문명 발전의 역사로 이어졌다. 지독스럽게 자기 본성을 고집하다가도 조건만 맞으면 허무하리만치 쉽게 변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 공기와 닮아,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는 스트레스 같은 건 안 받았나 보네.’ 본문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얘기들을 책 뒷부분에 ‘노트’라는 이름을 붙여 따로 정리해뒀는데, 흘러넘친 저자의 수다를 편집자가 힘겹게 주워담은 느낌이다.

  •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샘 킨 | 해나무 | 20,000원

[3]
<어른의 문답법>

“상대방이 품은 의도와 동기는 내 짐작보다 좋을 가능성이 크다.
상대가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짐작하면 대화는 숨 막히게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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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와 제목을 이으면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어른의 문답법>’이다. 이 한 줄에 물음표가 세 개나 떠오른다. 개싸움은 개보다 인간이 더 자주 하는데 왜 개싸움이라 부르는 걸까? <100분 토론>은 왜 항상 지적 토론의 장으로 시작해 개싸움으로 끝나는 걸까? 묻고 답하는 능력은 왜 어른이 될수록 오히려 퇴보할까? ‘Why?’ 대신 ‘How?’로 질문을 바꿔보자. 어른스럽게 대화하려면, 아니 최소한 개싸움은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은 총 6단계에 걸쳐 36가지 대화의 기술을 알려준다. 저자는 단계별로 천천히 익혀나갈 것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나에게 당장 유용한 건 초급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메시지 전달’은 ‘대화’가 아니라는 거. “대화란 주고받는 것인데, 메시지는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다. 메신저는 무언가를 굳게 신봉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고 결국 생각을 바꾸리라 착각한다.”

읽는 내내 떠오른 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개싸움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작할 땐 분명 달콤했던 대화가 왜 안 좋은 방향으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는지. 대화 중간에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라, ‘Y는 X 때문이다’처럼 인과관계를 단언하는 표현을 피해라, 상대방을 비판하기 전에 어떻게 그런 의견을 갖게 됐는지 물어라 등 연인과의 대화에 적용할 만한 조언들이 많다. 실제로 한두 번 써먹어봤는데, 대화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꽤 도움이 되는 듯하다.

어쩌면, 지적 토론의 장 같은 건 애초에 우리가 필요로 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덜 싸울 수 있다면, 덜 상처줄 수 있다면, 그래서 멈추지 않고 계속 대화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어른의 문답법> 피터 버고지언&제임스 린지 | 윌북 | 16,800원

[4]
<일터의 문장들>

“‘나는 누구인가’라는 큰 덩어리의 질문을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로 바꾸면 보다 명료해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철학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직업 철학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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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설문조사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가 진행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가장 신뢰하는 방송 프로그램 5위에 올랐다. 가장 불신하는 언론매체 1위는 <조선일보>였다.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고, 믿지도 않는 시대.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는 <조선일보>의 몇 안 되는 인기 콘텐츠다. 각 분야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고의 플레이어들을 인터뷰하는 컨셉이 <유퀴즈>와 닮았는데, 출발은 훨씬 빨랐다. 2015년에 시작된 이래 6년째 이어지는 동안 인터뷰를 묶은 책이 벌써 두 권 나왔고, 이 책은 세 번째다.

앞의 두 권 제목은 인터뷰 대상, 즉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자존가들>). 반면 세 번째 책 <일터의 문장들>에서는 누가 한 말이냐보다 그 말의 내용을 앞세운다. 실제로 많은 일터가 그렇다.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보다 중요한 건 일의 내용이다. 일하는 태도, 일하는 방식, 일을 둘러싼 환경까지. 그래서 앞서 출간된 책들에 비해 타깃이 넓다. 좋든 싫든, 잘하고 싶든 버티고 싶든 일과 더불어 살아갈 이들에게는 꽂히는 대목이 많다. 나도 밑줄을 많이 쳤다.

카카오 공동대표 조수용, 영화감독 봉준호, 빅데이터 분석가 송길영, 그리고 나의 요리 선생님 백종원 등 늘 궁금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그득하지만, 다음 독서로 연결해줄 훌륭한 저자들의 인터뷰도 많다. 개인적으로 특히 반가웠던 건 알베르트 사보이아! 그가 쓴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은 몇 달째 나의 추천도서 원픽이다.

  • <일터의 문장들> 김지수 | 해냄 | 17,800원

[5]
<0%를 향하여>

“미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미래를 본 적이 없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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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를 깊게 경험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B, C, D에는 A가 희미하게 묻어 있다.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은 놀라운 집중력을 바탕으로 예능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텐션을 만든다. 프로기사를 꿈꿨던 장그래의 상황 판단 능력은 정글 같은 종합상사에서 살아남는 무기가 된다. 판교 IT회사에서 다년간 일했던 장류진은 몇 달 취재로 파악할 수 없는 직장인의 기쁨과 슬픔을 소설 속에 그려낸다.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를 찍어본 사람이 쓴 소설은 뭐가 다를까. 궁금해하며 서이제 작가의 첫 단편소설집 <0%를 향하여>를 읽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영화를 찍으며 느낀 점이 있다면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뭘 계획해도 다 어그러진다’였거든요.” 표제작의 배경, 독립영화판이 딱 그렇다. 세운 계획마다 다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세계. 100페이지에 달하는 중편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의 시간 순서는 마구 뒤섞여 있다. 어차피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일의 순서가 뒤섞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계획한 적 없는 새로운 곳에 도착한 저자는 말한다. “근데 소설을 쓰고 난 뒤에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걸 경험하게 됐어요.”

앞서 얘기한 중편에는 1차 세계대전이 영화 편집 기술을 발달시켰다는 대목이 있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필름 중 상당수가 불에 타 없어졌고, 전쟁 이후 영화인들이 살아남은 필름을 모아 이렇게 저렇게 붙여보면서 여러 가지 편집 방법이 고안되었다는 얘기다. 전쟁을 깊게 경험한 사람이 만든 영화 얘기가, 영화를 깊게 경험한 사람이 쓴 소설 안에 있다. A를 깊게 경험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B, C, D에는 A가 희미하게 묻어 있다.

  • <0%를 향하여> 서이제 | 문학과지성사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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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