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흑축, 갈축 그리고 풀윤활 적축

안녕, 우울할 땐 키보드 ASMR을 듣는 에디터B다. 지금까지 다양한 키보드를 소개해왔다. 무접점 키보드부터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 그리고 기계식 청축 키보드까지....
안녕, 우울할 땐 키보드 ASMR을 듣는 에디터B다. 지금까지 다양한 키보드를 소개해왔다. 무접점…

2021. 10. 11

안녕, 우울할 땐 키보드 ASMR을 듣는 에디터B다. 지금까지 다양한 키보드를 소개해왔다. 무접점 키보드부터 휴대용 블루투스 키보드 그리고 기계식 청축 키보드까지. 갑작스럽게 공지를 하나 하자면, ‘완성된 키보드 제품’을 소개하는 리뷰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없을 거다. 내가 키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직 타건감 때문이고, 그런 이유라면 키보드를 사는 게 아니라 스위치만 바꾸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스위치 리뷰를 자주하게 될 것 같다(이래놓고 한 달 뒤에 해피해킹 리뷰할 수도 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키보드 리뷰를 시작한다. 오늘 소개할 키보드는 적축, 갈축, 흑축을 장착한 세 가지 키보드다. 모두 체리 스위치를 사용했다. 보통 키보드에 관심을 가지면 청축, 적축 같은 인기 스위치에서 시작해 결국엔 무접점 키보드에 정착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정반대였다. 레오폴드 무접점 키보드를 가장 먼저 썼고, 지금은 적축에 안착했다.

타건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위치다. 어떤 제조사에서 만든 스위치인지, 윤활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윤활을 했는지에 따라 소리와 타건감이 달라진다고 한다. 물론 스위치 외에 다른 요소도 영향을 준다. 상판, 기판, 하판, 보강판, 흡음재의 재질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말이다. 그것들에 대한 방대한 얘기는 나중에 경험치가 많이 쌓이면 리뷰하도록 하겠다.


[1]
COX 블랙펄 CNC 키보드 – 흑축

1400_retouched_ (32 - 38)

풀알루미늄으로 만든 키보드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COX 블랙펄 CNC 키보드’를 산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가격은 19만 9,000원. 키보드를 돈 주고 사 본 경험이 없다면 다소 비싸게 느껴지겠지만, 알루미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수용할 만한 가격이다. 나 같은 경우엔, 글을 써서 돈을 버니까 좋은 키보드엔 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다고 합리화했다. 언뜻 들으면 말이 되는 소리 같지만, 이미 내게 7대의 키보드가 더 있다는 사실은 이 말이 그저 합리화일 뿐이라는 걸 증명한다. 그래, 그냥 사고 싶었다.

1400_retouched_ (30 - 38)

이왕 사는 거 안 써본 축을 써보자 싶어서 흑축으로 구매했다. 검은색, 왠지 멋있는 컬러다. 블랙은 특별한 색이다. 악당이나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특별함, 비밀스러움, 고독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축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흑축이라니 멋있잖아).

체리 흑축의 키압은 60g으로 꽤 무겁다. 보통 많이 쓰는 적축, 청축, 갈축에 비해 손가락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걸림이 없는 리니어 계열의 대표 스위치 ‘적축’에서 키압이 더 무거운 버전이 ‘흑축’이라고들 말한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키압이란 키를 누를 때 필요한 압력이다. 키압이 높을수록 손가락에는 더 많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만큼 피로를 느끼기도 쉽다. 키에서 손을 뗄 때 올라오는 스프링의 반발력도 강하다. 이렇게 들으면 단점밖에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왜 흑축을 사는 걸까?

1400_retouched_ (33 - 38)

일주일 정도 블랙펄을 사용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엔 특유의 키압 때문에 불편했는데, 흑축을 쓰다가 다른 스위치를 쓰니 너무 심심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물 속에 있다가 땅을 밟을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키감이 이렇게 날아다닌다고? 뭔가 허전한데?’ 이런 역체감 때문에 흑축의 무거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흑축을 좋아하진 않지만, 왜 흑축의 타건감을 좋아하는지는 이해가 될 것 같다.

1400_retouched_ (34 - 38)

그렇다면 풀알루미늄 키보드에는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 일반 외관상으로 보자면, 플라스틱 소재의 키보드가 농민군이라면, 풀알루미늄 키보드는 미스릴 판금갑옷을 두른 기마병 같은 느낌이다. 무게는 무려 2.5kg! 무게 덕분에 타이핑을 할 때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지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게임을 하다가 화가 나도 키보드를 집어던질 수 없다. 집에 강도가 들면 무기로 쓸만큼 단단하지만 손잡이가 없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불편할 것 같다.

상판과 하판, 기판을 모두 알루미늄을 썼고, 타이핑을 할 때도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느낄 수 있겠지만.

1400_retouched_ (35 - 38)

남들과 다른 멋진 디자인의 키보드를 갖고 싶다면 COX 블랙펄 CNC 키보드를 추천한다. 한글을 하늘색으로 각인해 놓은 것도 멋진 디자인 포인트다.


[2]
엠스톤그루브T SF 풀윤활 키보드 – 적축

1400_retouched_ (4 - 38)

두 번째 소개할 키보드는 ‘엠스톤그루브T SF 풀윤활 실리콘’ 모델이다. 이름이 길고 어려워 보이지만 뜯어보면 쉽다. 꽈리고추와 돼지고기를 같이 볶은 요리를 꽈리고추제육볶음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쉽다. 이 키보드는 엠스톤그루브에서 만든 키보드이고, 일부 윤활이 아닌 풀윤활 했으며, 흡음재로 실리콘이 들어갔고, 적축 스위치를 쓴 제품이다.

1400_retouched_ (5 - 38)

키보드 리뷰를 찾아보니 키보드 이용자들에게 ‘윤활’이라는 건 최후의 필살기, 부스터샷 같은 느낌이었다. 스프링 소리가 들리고 스테빌라이저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제품에 윤활을 하면 한 단계 레벨업한다는 것이다. 스프링 소리가 줄어들고, 타건감은 정숙해진다. 내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윤활 작업만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비인가.

1400_retouched_ (8 - 38)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윤활을 하려면 여러 도구가 필요하고, 윤활 방법도 공부해야 하고, 키보드 조립과 해체까지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과정이 귀찮아서 포기하려던 찰나에 엠스톤그루브T SF 풀윤활 키보드를 발견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키보드는 윤활을 한 상태에서 출고가 되기 때문에 내 손에 크라이톡스 하나 묻히지 않고 풀윤활 키보드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참고로 이 제품은 내가 최종 정착한 키보드이기도 하다.

1400_retouched_ (3 - 38)

1400_retouched_ (2 - 38)

적축이기 때문에 흑축, 청축에 비해 타건감이 가볍고,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미니멀하다. 마치 노이즈캔슬링을 켠 것처럼 잡스러운 느낌을 제거한 보강판을 두드리는 간결한 소리만 준다. 오히려 키압이 더 무거운 같은 리니어 계열의 흑축과 비교해도 점잖음 느낌이다. ‘이게 바로 윤활의 힘이구나’. 참고로 한 번 윤활을 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 혹시 윤활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한 고민을 거친 뒤에 하시길.

키보드 디자인에 대해서도 살짝 소개하자면, 인디언 핑크 컬러의 키캡이 포인트다. 하지만 이 키캡은 엠스톤그루브T SF 제품을 구매할 때 추가 비용을 내고 별도 구매해야 한다. 또 조금 더 레트로한 디자인의 라이트 그레이 컬러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3]
듀가드 퓨전 키보드 – 갈축

1400_retouched_ (23 - 38)

갈축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청축보다 조용하고, 적축보다는 구분감이 느껴지는 타건감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걸까? 그렇다면 인생 스위치가 될 것 같았다.

키보드의 스위치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청축 같은 구분감이 느껴지는 클릭 스위치(키를 누를 때 걸리는 느낌이 난다), 그리고 청축에서 클릭음을 제거한 넌클릭 또는 택타일 스위치(구분감은 있지만 클릭음은 없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구분감이 느껴지지 않는 리니어 스위치가 있다(심심할 수 있지만 특유의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1400_retouched_ (15 - 38)

나는 처음에는 청축을 한 달 정도 쓰다가 적축으로 기기 변경을 했다. 조용하고 구분감이 없는 타이핑이 심심하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적축은 나와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갈축을 써보게 된 것이다. 갈축은 키압이 45g 정도로 낮은 편이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슬쩍만 눌러 타이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프링이 다시 올라오는 반발력은 흑축 못지 않게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청축만큼이나 시끄럽진 않지만 소음은 꽤 있는 편이라 공용 공간에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시끄러운 키보드는 불화의 씨앗이 된다). 갈축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애매하다’. 청축만큼 경쾌한 타건감을 주지도 않고 적축만큼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어서 3일 정도 써보고 다시 창고에 넣었다. 하지만 키보드 취향엔 정답이 없으니 반드시 타건을 통해 본인에게 맞는 스위치를 찾아보길 바란다.

1400_retouched_ (27 - 38)

그리고 ‘듀가드 퓨전’에 대한 소감을 말하자면,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일단 통울림을 잡지 못했고 스프링 소리가 들린다. 어느정도 소음이 있는 공간이라면 들리지 않겠지만, 집에서 가만히 글이나 쓰는 사람에겐 정말 신경쓰인다(내가 청각적으로 많이 예민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

1400_retouched_ (19 - 38) 1400_retouched_ (20 - 38) 1400_retouched_ (21 - 38)

약간의 입력 지연도 있다. 블루투스와 무선 리시버 두 가지 방식으로 모두 연결해보았는데, 다른 블루투스 키보드와 비교했을 때도 글자가 입력되는 시간이 약간 늦다. 물론 이것도 내가 예민한 편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가 내겐 너무 큰 단점이라 사용하지 못하겠더라. 물론 장점도 있다. 블루투스 2개 멀티페어링을 지원하고, 무선 리시버가 로고 뒤에 숨어 있어서, 유선 연결까지 사용하면 최대 4개까지 연결할 수 있다.

1400_retouched_ (24 - 38)

레트로한 느낌의 키캡 컬러와 오렌지색 포인트도 예쁘다. 2021년에서 만든 레트로 디자인이라기보다는 1971년에 만든 미래지향 디자인 같다. 왠지 <빽 투 더 퓨처>에 나올 것 같은 디자인이다.


오늘 키보드 리뷰는 여기까지다.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키보드를 사기 전에 많은 정보를 찾아본다. 커뮤니티는 기본이고 블로그 리뷰, 유튜브 영상 리뷰까지. 타건음을 들을 수 있는 유튜브 영상 리뷰가 가장 결정적인 정보를 주는데, 막상 제품을 받으면 영상에서 듣던 소리와 또 다르다. 유튜브가 아무리 발전해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까지는 전달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의 맛을 미각과 후각으로 함께 느끼듯, 타건감은 청각과 촉각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백문이불여일타, 마음에 드는 키보드가 있다면 가까운 타건샵에서 두드려 보길 권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