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명절에 할 일은, 나의 그늘을 읽는 일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1. 09. 13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쓴다(아,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주말을 쪼개 낱말퍼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든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 5권을 꼽아봤다. 예전엔 이 넓은 세상 언제 다 알아가나 막막했는데, 이젠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길 바란다. 나의 무른 부분은 어디인지, 나는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나는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무엇인지.


[1]
<나의 복숭아>

“사실 이러한 나야말로 가장 나에 가까운 모습이고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내 안에서 나를 지탱해온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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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과일 복숭아에 대해 여러 사람이 나눠 쓴 책인 줄 알았다. 복숭아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복숭아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 이름이 ‘김복숭’인 사람… 물론 아니었다. 여기서 복숭아는 비밀, 아킬레스건, 치부 등을 의미한다. 즉, <나의 복숭아>는 나의 무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딱복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컨셉을 이해하자마자 책을 샀다. 나는 ‘복숭아’에 집착하는 편이다(딱복 말고 누군가의 무른 부분). 당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궁금하다. 자신 있는 분야에 대한 일장연설보다는 컴플렉스에 대한 고백을 듣고 싶다. 인스타 스토리에 올라온 사진보다는 간밤에 썼다 지운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면접관으로 들어갈 일이 있을 때마다 꼭 이런 질문을 할까.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단점은 무엇인가요?”

아, 물론 복숭아는 스스로 꺼내놓을 때 맛있다. 남의 복숭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너무 많고, 그럴 때마다 복숭아 주인은 원치 않는 상처를 받는다. 만약 이 책 제목이 <너의 복숭아>였다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너 노래 되게 못하는 거 알지?’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아홉 명이 나눠 썼다는 것이다. 정답 없는 문제의 풀이 과정 같은 아홉 편의 글을 읽다 보면, 구석에 감춰뒀던 나의 복숭아도 슬쩍 쳐다보게 된다. 그래, 너도 거기 있었지 참.

  • <나의 복숭아> 김신회 외 8명 | 글항아리 | 13,800원

[2]
<수어: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엄마가 수어를 배운다면, 엄마도 솔직하게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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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복숭아를 꺼내 보자면… 생각만 하고 실행을 미루다가 결국은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 잦다.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몇 년 전의 생각도 그렇게 잊혔다. 관련 다큐를 본다, 책을 읽는다 같은 ‘준비의 준비’만 하면서 수어학원 등록을 미뤘고 결국은 잊어버렸다. 다행히 이 책이 기억을 되살렸다. 난 과연 올해 안에 수어학원에 등록할 수 있을까. 우선 이 책부터 읽어보자, 라고 생각했다(이번에도 난 ‘준비의 준비’부터 시작하는구나…).

한국어를 배울 때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어는 어땠나. 한국어를 기준으로 영어를 익혔다. ‘안녕’은 영어로 ‘Hello’구나, ‘괜찮아’는 영어로 ‘That’s all right’이구나. 제2외국어였던 일본어, 교양수업 시간에 들었던 중국어, 독일어 모두 마찬가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곧 한국어와의 차이를 의식하는 과정이다.

수어를 배울 때도 역시 기준은 한국어다. ‘ㄱ’은 한 손으로 기역 자 모양을 만들면 되는구나. ‘괜찮다’라고 말하려면 수어로 오른 주먹의 새끼손가락만 펴서 턱 끝을 톡톡, 두 번 두드리면 되는구나.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는 수어와 구어(음성언어)의 차이. 수어로 이야기할 때는 느낀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표정 또한 수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손으로 ‘괜찮다’와 같은 동작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면 ‘괜찮지 않다’라는 정반대의 뜻이 되어버린다. 수어를 꼭 배워야겠다고,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랑과 기쁨을, 불안과 슬픔을 덮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에게 수어는 약이다.

  • <수어: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이미화 | 인디고 | 11,000원

[3]
<지구 끝의 온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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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픽션에는 힘이 있다. 폭발력보다는 지속력에 가까운 힘. 데뷔작이 나오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린 김초엽 작가의 폭발력을 목격했다. 그리고 앞으로 오랫동안 그의 지속력을 목격하게 될 것 같다. <지구 끝의 온실>은 환경에 대한 이야기, 즉 ‘커다란 온실이 되어버린 지구’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은 그렇다.

이 소설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이 소설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일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더 이상 피를 뽑히지 않아도 되어서, 매일 밤 긴장 상태로 잠들지 않아도 되어서 이곳에서의 삶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서 좋았다. 이 마을이 나를 꼭 필요로 해주는 것 같아서.”

이 소설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마음을 모두 주었던 이 프림 빌리지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끝이 결코 오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도 여기에 내 마음이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평생 동안 붙잡혀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소설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너를 의심하지 마.”

  •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 자이언트북스 | 15,000원

[4]
<책대로 해 봤습니다>

“많은 책이 자신을 달래는 방법을 다루지만,
애초에 달래야 하는 자신을 만든,
근본적인 문제에는 접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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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가?’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가 한 시간 동안 얘기한 주제다. 내 생각에 자기계발서는 지름길 안내서다. 먼저 길을 가본 저자가 알려주는 길대로 가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도 좀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친구의 의견은 ‘도움이 안 된다’였다. 결국 내 길은 내가 직접 걸어봐야 찾을 수 있으며, 남이 그린 지도를 보고 따라가다가는 오히려 더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헷갈렸다. 친구 말대로 사람은 다 다르고, 저자가 효과를 본 방법이 나에게도 효과적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서점에서 <책대로 해봤습니다>를 발견했다. 책은 제목 그대로다. 시중에 나온 자기계발서 50권을 읽고 그대로 해본 다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기록한 이 책의 목차는 심플하게 나뉜다. 해보니까 괜찮았던 것, 해봤는데 별로였던 것. 예를 들어 기기와 떨어져 지내기는 괜찮았고, 명상하기는 별로였다. 개인적으로 괜찮았던 것보다는 별로였던 것이 훨씬 재밌었다. 일찍 일어나기, 명상하기, ‘하면 된다’라고 믿기 등 자기계발서의 단골 잔소리들을 ‘별로였다’라고 얘기하는 데서 오는 통쾌함이 있다.

그렇다면 나랑 안 맞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건 시간 낭비일까? 내 생각은 여전히 ‘도움이 된다’ 쪽이다. 단,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위해서.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알아내고, 우리를 잘못된 방식으로 괴롭히는 것들을 시도해 보면 자신에 대해 새로운 걸 많이 알 수 있어.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록,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즐거운 삶을 위해 어떤 것을 구체화해야 하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더라.”

  • <책대로 해 봤습니다> 졸렌타 그린버그&크리스틴 마인저 | 알에이치코리아 | 14,800원

[5]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당신이 당신의 가장 멋진 점을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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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슬플수록 기쁨 주는 말이 절실하다. 저자는 기쁨이 될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넘치는 게 말이고 이야긴데 뭘 찾아 나서기까지? 하는 생각은 책을 읽는 동안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넘치는 게 말이고 이야기였는데 기쁨이 될 이야기는 나는 왜 들은 적이 없었을까. 저자처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 주는 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나의 복숭아>가 ‘가장 무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라면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가장 단단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복숭아씨’ 정도의 별명을 붙이고 싶은 책이다. 저자가 만난 사람 중에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유명인은 없다. 책을 써서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책을 쓰는 시대, 이름 모를 어부와 할머니와 낚시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른 복숭아 속에 감춰진 씨처럼 단단하고, 거칠고, 신비롭다.

밑줄친 문장이 너무 많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가 아름다운 단어를 품은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눴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두 줄 옮긴다고 책의 감동이 전달되진 않겠지만, 그냥 이렇게 끝내는 것도 직무유기인 것 같아 한 대목만 옮긴다. “슬픔과 아픔이 경이롭게 변한 말, 하쿠나마타타. 생의 경이가 아니라 생의 경시가 가득한 이 사회에서 조건이 하나 붙으면 이 말은 백 퍼센트 진실에 가까워진다. ‘당신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번에 읽은 다섯 권 중 나는 이 책이 특히 더 좋았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다. 어디를 내 목적지로 삼아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혹은, 내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헷갈릴 때마다.

  •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 위고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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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