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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온 기계식 키보드, Epomaker B21

안녕, 이제는 키보드 세계에서 탈덕하고 싶은 에디터B다. 키보드에 대한 수집욕이 지금은 많이 줄었는데, 3개월 전만 해도 욕심이 정점에 있었다. 청축, 적축,...
안녕, 이제는 키보드 세계에서 탈덕하고 싶은 에디터B다. 키보드에 대한 수집욕이 지금은 많이 줄었는데,…

2021. 09. 07

안녕, 이제는 키보드 세계에서 탈덕하고 싶은 에디터B다. 키보드에 대한 수집욕이 지금은 많이 줄었는데, 3개월 전만 해도 욕심이 정점에 있었다. 청축, 적축, 갈축, 흑축 등 온갖 스위치의 키보드를 소장하고 싶었다. 도각도각, 보글보글 거리는 타이핑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울렸다. 오늘 소개할 키보드는 그때 그 시절 펀딩한 키보드다. 솔직히 말하면 펀딩할 때만 해도 갖고 싶어서 현기증이 났는데, 제품이 도착하기 전에 애정이 짜게 식었다. 펀딩이라는 게 그렇다. 잊고 살다 보면 보면 제품이 도착하고, 감흥 없이 포장을 뜯게 된다. 마치 사춘기 청소년의 첫사랑 같달까. 이런 것을 펀딩의 매력이라고 해야 할지 단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이 제품을 거의 석 달이 지나서야 받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답답함 때문에 인디고고, 킥스타터 같은 해외 펀딩 사이트를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오직 인디고고를 통해서만 제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기계식 키보드 Epomaker B21이다. 이포메이커라고 읽으며, 중국 브랜드다.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진 브랜드가 아니다. 구글이나 유튜브에 검색해도 정보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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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디자인 때문이었다. ‘Epomaker B21 – Retro Wireless mechanical keyboard’라는 이름처럼 레트로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컬러는 연한 아이보리이며 그레이 컬러와 투톤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쓰던 486 컴퓨터와 비슷한 컬러 조합이다. 그리고 ESC, Enter, Space bar에는 연두색을 적용했다. 키캡 교체로 이런 조합을 구현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출고해주시면 고객에겐 베스트가 아닌가.

키캡 놀이가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걸 처음엔 몰랐다. 키캡 몇 개 사다 보면 키보드 가격을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그때부턴 키캡 푸어가 되는 거다. 나도 한때는 영혼을 담아 레트로한 키캡을 모아보려고 시도했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며 지금은 마음을 접었다. 레트로를 쫓다가 내 통장이 레트로해질 뻔했다(다른 말로는 자산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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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omaker B21은 컬러만 레트로한 게 아니다. 모양도 제대로 레트로하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동글동글하며, 키캡을 제외한 키보드 판은 유광처리가 되어 있어서 촌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데 이게 내 취향을 저격한다. 현재의 세련됨이 아닌, 과거의 세련됨을 담고 있는 디자인이다. 마치 과거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실수로 두고 간 듯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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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과 오른쪽 상단에는 각각 볼륨과 키보드 백라이트를 조절할 수 있는 다이얼이 있다. 다이얼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볼륨이 커지고 반대로 돌리면 불륨이 작아진다. 조절할 때 한 단계씩 걸리는 구분감이 있어서 미세하게 디테일하게 조절하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숨겨진 기능! 버튼을 ‘딸깍’ 누르면 바로 음소거 모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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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라이트 다이얼 역시 마찬가지로 조작 방식은 같다.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백라이트가 밝아진다. 다이얼을 딸깍 누르면 백라이트 디자인이 바뀌는데 다양한 백라이트 디자인을 넣었다는 점이 레트로 컨셉과는 상반되는 요소라 의외의 매력처럼 느껴진다. 투브릿지 안경테에 레트로 자켓을 입었는데 손목엔 애플워치를 차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이얼의 컬러다. 반짝거리는 핑크색이 아닌 차분한 핑크를 적용했다면 어땠을까. 인디언 핑크 같은 톤다운된 컬러에 썼다면 다른 키캡과 더 어울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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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 다이얼과 백라이트 다이얼 사이의 공간은 7가지 버튼으로 꽉 채워놓았다. 왼쪽부터 다음 재생/일시 정지, 다음 곡 재생, 이전 곡 재생 버튼이 있고, 최대 3대의 멀티페어링을 지원하는 버튼이 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Mac/Win 버튼을 누르면 OS에 맞게끔 키배열이 조금 바뀐다. 예를 들어, 윈도우에서는 시작 버튼인 것이 Mac에서는 커맨드 키가 된다. 다음 곡 재생 오른쪽에 있는 버튼은 계산기인데 계산기 버튼을 별도로 만들어놓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어떤 세계에서는 단축키로 넣어야 할 만큼 빠른 계산이 중요한가 보다.

이러한 기능키를 딸깍거리는 키감의 버튼으로 넣은 것도 재미있는 요소다. 최신식 기계에서 볼 수 없는 방식이다. 키감은 블랙베리 키패드 혹은 현관문 비밀번호 키패드 같은 느낌이다. 기분이 좋아서 계속 누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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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투스 5.0을 지원해서 무선 연결이 가능하고, USB-C를 통한 유선 연결도 된다. 4,000mAh 배터리가 들어갔으며, 백라이트를 켠 상태에서는 36시간, 끈 상태에서는 240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완충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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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껏 아이맥과 애플 매직 키보드를 쓰다가 Epomaker B21로 갈아탄 후 이 제품에 완전 정착했다. 만족스럽다. 솔직히 중국 브랜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밀로 같은 키보드 브랜드를 봐도 중국 키보드에 대한 평가가 꽤 좋은 경우도 많더라. 다음엔 바밀로 키보드를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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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MX 스위치를 사용하고 있으며 펀딩할 때 청축, 갈축, 적축 중에서 고를 수 있는데 나는 청축을 골랐다. 청축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청축 키보드에 대한 큰 오해가 있었다. 시끄럽고, 호불호를 많이 타고, 귀가 피곤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을 동경한 프로스트처럼 써본 적 없는 스위치이니 써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레트로 디자인의 키보드라면 자고로 청축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사용해보니 키를 누르는 맛이 어떤 키보드보다 시원하고 경쾌하다. 칠성사이다처럼 시원한 타건감으로 타이핑하는 맛이 좋다. 무접점 키보드가 마음을 가라앉힌다면 청축은 텐션을 높여주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청축 키보드는 포브스 선정 직장 동료가 가장 싫어하는 키보드다. 내가 들을 땐 좋아도, 다른 사람이 쓸 땐 이것만큼 신경을 긁는 소리가 또 없을 거다. 반드시 집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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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높이가 높은 편이라 팜레스트는 필수다. 지금껏 팜레스트 없이 기계식 키보드를 써왔는데 Epomaker B21은 다른 키보드에 비해서 살짝 더 높은 편이더라. 팜레스트를 구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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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omaker B21을 파는 곳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공식 홈페이지에서 현재 예약 주문을 받고 있더라. 아무도 살 수 없는 키보드를 소개할 뻔했다. 가격은 149달러. 사이트에 살짝 구경을 가보았는데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알록달록한 키보드가 눈을 현혹한다. 다행히도 내가 구매한 키보드가 압도적으로 예뻐서 다른 키보드엔 욕심이 않았는데… 키캡을 보니 심장이 울렁거린다. 나 혼자 괴로워할 순 없어서 링크를 공유한다.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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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