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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끝자락의 신상 맥주 5종

안녕,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김은아다. 만 원은 21세기의 새로운 단위다. 적어도 술쟁이들에게는. ‘맥주 네 캔 만 원’이라는 공식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안녕,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김은아다. 만 원은 21세기의 새로운 단위다. 적어도 술쟁이들에게는. ‘맥주…

2021. 08. 24

안녕, 디에디트의 객원필자 김은아다. 만 원은 21세기의 새로운 단위다. 적어도 술쟁이들에게는. ‘맥주 네 캔 만 원’이라는 공식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싶게 안정감을 준다. ‘10,000’이라는 숫자에 0이 네 개 들어있다는 것조차 맥주 네 캔을 살 수 있다는 상징 같다. 따지고 보면 할인 금액은 겨우 몇백 원이라지만, 카드 결제 문자의 단정한 금액과 길쭉한 캔들을 한 아름 안아 들었을 때의 포만감은 기어코 네 캔을 채우게 만든다. ‘만 원의 행복(감)’을 더해줄 최고의 조합을 찾아, 신상 맥주를 마셔봤다.


[1]
말표 청포도 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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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지쳤어요(땡벌 땡벌). 요즘 편의점 맥주 냉장고 앞에 서면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다. 별별 브랜드와의 콜라보로 2절, 3절, 4절까지 멈출 줄을 모르는 맥주들에 질려버렸다. 대부분이 콘셉트만 있고 맛은 없는 제품이라는 것도 피로를 더한다. 대체 구두약과 맥주의 공통점이 뭐냐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호기심으로 꺼내든 말표 청포도 에일에는 예상 못한 한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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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과일맛 맥주에는 딜레마가 있다. 과일 향을 너무 잘 구현하면 주스가 되어버리고, 맥주 맛을 살리면 과일 맛이 묻혀버린다. 얼마 전 ‘맥덕’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맥주에 도전했다가 그 딜레마를 경험했다. 맥주에 과일 퓨레를 첨가한 스무디 맥주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생과일이 들어갔으니 가격도 비싸고(500ml 한 캔에 2만 원 이상) 찐득하다. 문제는 과일 풍미를 잘 살리려다 보니 이것이 맥주인지, 알코올을 첨가한 과일 맛 음료인지 영 모르겠더라는 것. 말표 청포도 에일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청포도 향은 풍부하면서도 맥주의 쌉싸레함은 살아있다. 뛰어난 균형감으로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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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장점은 가향 음료 특유의 끈적함이 없다는 것. 개인적으로 단맛 술을 선호하지 않는데, 마시고 나면 입이 텁텁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맥주는 청포도의 달콤함이 머무르는 것은 잠시이고, 이내 입안을 말끔하게 정리해준다. 맥주를 만든 스퀴즈브루어리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출시일까지 미뤘다고 하는데, 납득이 가는 맛이다. 씁쓸한 맥주파와 달달한 알코올파의 교집합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맥주다.


[2]
SSG 랜더스 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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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팬은 아니다. 그러나 야구 경기를 보면서 괴성(주로 욕)을 지른 다음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 힘으로 또 괴성을 지르고, 다시 한번 들이키고… 그래서 야구 구단의 이름을 딴 맥주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라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을 불태우는 화병을 단번에 진화하려면 벌컥벌컥 들이켜야 할 테니까. 실제로 SSG가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와 손잡고 ‘SSG 랜더스’의 이름을 따 내놓은 맥주는 총 두 종류인데, 한 가지가 ‘랜더스 라거’다. 나머지 한 가지는 ‘슈퍼스타즈 페일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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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거의 캔은 선수 유니폼과 같은 강렬한 붉은색 컬러다. 그게 어울리는 터프함을 기대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의외로 가녀리다. 잔잔한 꽃향기와 탄산이 과하지 않아 꿀떡꿀떡 넘기기에 좋다. 보리차를 연상케 하는 구수한 맛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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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끝에 독특한 산미가 느껴져서 신맛에 민감한 이에게는 ‘불호’로 작용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산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도드라지니까 빨리 먹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주변 야구팬들을 보면 속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추천 안주는 파삭파삭한 감자칩이나 치킨. 그리고 천불을 불러일으키는 응원팀의 실책…


[3]
핸드앤몰트 라온 위트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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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기억을 되살려본다. 먼 나라로 떠났던 언젠가를. 말은 안 통하고, 길은 어렵고, 계획은 꼬여서 한없이 지칠 때. 그럴 때 마주치는 맥도날드 간판은 얼마나 반가운가. 최고의 맛은 아닐지 몰라도 기대하는 정도의 맛은 분명히 낼 것이라는 보증수표 같달까. 핸드앤몰트는 나한테 그런 브랜드다. 편의점 사장님의 도전정신으로 냉장고가 온갖 새로운 맥주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이름. 한국 크래프트 브루어리 1세대로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하면서도 언제나 평균 이상의 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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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앤몰트에서 최근에 내놓은 라온 위트 에일은 밀맥주다. 라거 등의 맥주가 보리 맥아(엿기름)를 사용해 만든다면, 밀맥주는 보리 맥아와 밀 맥아를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쌉싸름하다기보다는 부드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라온 위트 에일은 이런 전형적인 밀맥주의 특성을 잘 구현했다. 잔에 따르면 뽀얀 맥주 위로 빽빽한 거품이 올라온다. 동시에 새콤한 과일과 달콤한 꽃향기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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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에서 희미한 바나나 향이 느껴지는데, 뾰족한 모서리 없이 둥글게 넘어가는 목 넘김이 마시는 바나나킥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제법 밀도 높은 질감을 지녀 끝맛이 잔잔하게 입에 남는다. 귀가하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켜기보다는 한숨 돌리고 차분히 맛을 음미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리는 맥주에 가깝다. 짜고 매운 K음식을 먹을 때 곁들이면 특유의 부드러움이 입안을 중화시켜줄 것 같다.


[4]
알함브라 라거 싱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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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쁜 맥주는 무엇인가. 술 라벨의 외모지상주의자로서 일단 우아한 라벨에 반하고 말았다. 잔에 따른 맥주도 고운 황금빛을 자랑한다. 동시에 풍겨오는 홉과 꽃의 아로마까지, 시각과 후각으로 단숨에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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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라거 싱귤러는 마트에서는 보기 드문 스페인 맥주다. 남부 도시 그라나다에서 100년째 맥주를 만들고 있는 브루어리 세르베자스 알함브라가 맥주의 생산자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쌓인 장인들의 노하우로 정교한 생산 공정을 거친다. 덕분에 월드비어어워드, 국제식음료품평원 대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쓴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인 시상식의 심사위원처럼 섬세하고 전문적인 혀가 아니어도 괜찮다. 누가 마셔도 모를 수 없게 맛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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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다, 풍미가 좋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모자란 복합적인 맛이 차례로 층층이 입을 채우는데, 그것이 퍽 고급스럽다. 특별히 안주에 신경을 쓴 날이면 주저 없이 알함브라 라거를 선택할 것 같다. 호사스러운 식탁을 완성해 줄 테니까.


[5]
캬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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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내 동선에서는 좀처럼 세븐일레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캬 맥주는 세븐일레븐에서만 판다. 편의점 맥주란 무엇인가. 새벽 2시라고 해도 손 닿을 데에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 아니었나. 그런데 캬 맥주를 구하기 위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헤매고 있자니 ‘맛이 없기만 해봐라’는 생각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 많은 편의점을 놔두고 굳이 세븐일레븐을 찾아 캬 맥주를 사러 갈 필요가 있을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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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맥주는 한마디로 전형적이다. 잔에 따를 때 풍기는 구수한 향, 밝고 투명한 황금빛 액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탄산, 그리고 이름처럼 ‘캬’를 외치게 되는 목 넘김까지. 우리가 맥주에 기대하는 맥주다움을 모두 충족한다. 솔직히 특출난 장점은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평범하게 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처럼, 어느 요소 하나 기준선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평균 이상의 점수를 내는 맥주 또한 생각보다 만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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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맥주라는 이름을 단 자유분방한 술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더. 그래도 좀 짜게 느껴지는 이 채점표의 점수는 안주와 함께하는 순간 훌쩍 올라간다. 배달음식의 자극적인 맛을 깔끔하게 잡아주는 환상의 서포터즈가 되어주니까. 케이크를 먹을 때 아메리카노처럼, 햄버거를 먹을 때 콜라처럼, 맛있는 안주를 먹을 때 곁들이면 배불러도 한 입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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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전시, 공연, 와인에 대한 글을 씁니다. 뉴스레터 '뉴술레터' 운영자. 뭐든 잘 타요. 계절도, 분위기도, 쏘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