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워라밸이 보장되면 행복할까?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2021. 08. 18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고르고 보니 이번 책들이 유독 서로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코드 몇 개로 사람들의 여가시간을 바꿔버린 게임 디자이너, 코드 몇 개로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실리콘 밸리의 창업자 무리, 앱 하나로 세상을 바꾸려는 좀 특이한 창업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삶 속에서 ‘내 일을 어느 위치에 둬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그러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냥 눕고 싶어진다. 다섯 권을 모두 읽고 누웠을 때의 기분 좋은 피곤함은 아직 나만 알겠지.


[1]
<시드 마이어: 컴퓨터 게임과 함께한 인생>

“좋은 게임은 우리에게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며 다시 도전할 기회는 거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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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책을 읽다 보면, 엄청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악마의 게임 <문명>을 플레이하게 됩니다. 시험, 승진, 백신 예약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면 그 일을 마친 후에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아직도 2015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이 게임을 하다 보니 한 학기가 끝나 있었다 등 <문명>에 대한 호들갑은 여느 도시전설처럼 과장되어 있었다. ‘문명하셨습니다’라는 말장난에 피식거리다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게임이길래?’ 금요일 밤에 <문명5>를 깔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월요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무서웠다. 귀신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게임을 껐다. 삭제를 위해 알파벳순으로 정렬된 프로그램 리스트에서 C(Civilization)를 찾았다. 없었다. 뭐지? 한참 만에 S(Sid meier’s civilization V)를 찾았다. 시드 마이어? 그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고 봐야 했다. 힘들게 취직한 회사에서 쫓겨날 수는 없었다. 게임을 삭제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시드 마이어가 <문명>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구나.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매출 관리 기기 제작회사에 다니며 취미 삼아 게임 코드를 짜던, 보통의 직장인이다. 물론 그가 만들어낸 건 보통 게임이 아니었지만. 그는 어떻게 <문명>처럼 악마 같은, 아니 중독성 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의 게임론은 현자가 평생에 걸쳐 뽑아낸 진리 한 줄처럼 단순하다. “좋은 게임은, 흥미로운 결정의 연속이다.” 나의 결정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동안 우리는 점점 <문명>에 빠져들고, 계절은 또 바뀌어 있을 것이다.

  • <시드 마이어: 컴퓨터 게임과 함께한 인생> 시드 마이어&제니퍼 리 누넌 | 영진.com | 19,800원

[2]
<언캐니 밸리>

“나는 옳다는 느낌을 좋아했다. 나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을 사랑했다.
하지만 행복하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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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닌 존재 M이 있다. 예를 들면 로봇이나 인형 같은 거. M이 인간과 비슷할수록 M에 대한 인간의 호감도는 올라간다. 몸체 위에 둥근 머리통이 있거나, 머리통 전면에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가 있거나. 일종의 친근함이다. 근데 비슷한 정도가 일정 선을 넘어가면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일종의 거부감이다. ‘쟤는 인간이 아닌데 왜 인간인 척해? 기분 나쁘게…’ 닮은 정도에 따라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이 구간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불쾌한 골짜기)라 한다.

‘출판계 종사자의 실리콘밸리 체험기’로 요약될 이 책의 제목이 <언캐니 밸리>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밸리’ 라임이 주는 1차원적 재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골짜기’다. 본래 언캐니 밸리는 M이 인간과 너무 닮아 생긴 골짜기였는데, 저자가 들려주는 얘기는 반대다. 인간이 M과 너무 닮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 M은, 실리콘밸리를 돌아가게 하는 힘이다. 인터넷, 코드, 알고리즘, 뭐 그런 거. 처음엔 M으로 무장한 인간이 마냥 좋아 보였는데, 어느 수준을 넘어서니 좀 질린다. ‘쟤는 인간인데 왜 인간이 아닌 척해? 기분 나쁘게…’

골짜기는 점이 아니라 선이다. 고점과 저점이 아니라, 그 두 점을 잇는 선이 골짜기를 구성한다. 점이 아니라 선을 얘기한다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4년간 종이 잡지를 만들다 2년 전 스타트업 세계에 들어선 나도 그 선 위를 지나는 중이다. 이 세계의 긍정, 이성, 합리는 늘 옳고 그 덕분에 높아진 효율을 체감한다. 하지만 가끔은 쓸데없는 고민과 부정적인 감정에 ‘리소스’를 낭비하는 비효율을 맘껏 누린다. 그래야, 좀 살 것 같으니까.

  • <언캐니 밸리> 애나 위어 | 카라칼 | 18,500원

[3]
<노 필터>

“인스타그램의 위력은 거기에 올라오는 게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게시물이 주는 느낌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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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까지 <언캐니 밸리>를 읽고, 수요일부터 바로 <노 필터>를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애나 위어 생각이 났다. 애나 위어가 경험한 테크기업이 인스타그램이었다면 <언캐니 밸리>의 결말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그만큼 이 책이 들려주는 인스타그램의 8년은, 지금껏 봐왔던 실리콘밸리 성공 신화와 결이 조금 달랐다.

<노 필터>는 케빈 시스트롬과 마이크 크리거가 사진 공유 서비스를 처음 구상한 순간부터, 이용자 10억 명을 뒤로하고 인스타그램을 떠나기까지의 기록이다. 8년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책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이벤트는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 인수’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좋아요, 팔로우, 중독, 광고, 인플루언서 등 비슷한 점이 많은 SNS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두 앱이 얼마나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상당 부분 페이스북 창립자 저커버그와 인스타 창립자 시스트롬의 차이이기도 하다.

저커버그는 세계를 연결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성장해야 했고, 그러려면 광고 수익을 늘려야 했고, 그러려면 고객 행동을 하나하나 분석해 개인화된 뉴스피드 알고리즘을 보여줘야 했다. 시스트롬은 인스타그램을 창의력의 배출구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려면 참신하고 의미 있는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해야 했고, 그러려면 광고는 제한해야 했고, 그러려면 저커버그와 맞서야 했다. 결국 시스트롬은 인스타그램을,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페이스북을, 인스타그램을 페이스북처럼 만들고 싶어 한 저커버그를 떠났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은 분, 혹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준비운동이 필요한 분들에게 두 편의 넷플릭스 다큐를 추천한다. <앱스트랙트 – 이언 스폴터 편>에 시스트롬이 그려왔던 이상이 담겨 있다면, <소셜 딜레마>에는 그가 피하고자 했던 현실이 있다.

  • <노 필터> 사라 프라이어 | 알에이치코리아 | 19,800원

[4]
<삶으로서의 일>

“사람은 기계보다 훨씬 더 깨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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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차 제목부터 서늘하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되었고, 코스피 지수가 3000을 뚫었는데 행복은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우울증이 감기 같은 거라는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다. 그만큼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늘었다. 스트레스는 공기처럼 익숙해졌다. 조만간 ‘스트레스 없는 마음’을 돈 주고 사게 될지 모른다.

이 모든 우울과 스트레스의 중심에 ‘일’이 있다. 일이 많아서 혹은 일이 없어서, 몸이 힘들어서 혹은 마음이 힘들어서, 사람이 싫어서 혹은 혼자가 외로워서. 일이 힘든 우리는,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일과 삶을 분리하여, 일하지 않을 때만이라도 온전한 나의 삶을 누리는 것.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 워라밸이다.

그럼 워라밸이 보장되면 좀 괜찮을까? 저자는 ‘살아가는 나’와 ‘일하는 나’를 억지로 쪼개는 것이야말로 우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워라밸 대신 제시한 다른 방법은 ‘삶으로서의 일’을 찾자는 것이다. 삶과 분리하지 않아도 되는 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일, 내가 나임을 느낄 수 있는 일.

물론 이런 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책에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나눈 환자들과의 대화를 수년간 기록한 간호사 얘기가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돌아봤을 때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일로 보낸 것’이다. 지금 바로 생각해보자.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나는 무슨 일로 내 삶을 채워야 하는가.

  • <삶으로서의 일> 모르텐 알베크 | 김영사 | 15,000원

[5]
<날마다 만우절>

“암이 폐로 전이되었다는 말을 들은 날 영순은 택시기사에게 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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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재밌다 생각하며 읽은 책은 명랑소설이었다. 학교를 배경으로 당시의 내 또래 학생들이 등장하는, <6학년 0반 아이들>, <별난 초등학교> 같은 제목의 이야기들. 돌이켜보면, 명랑소설이라 불렀지만 주인공이 늘 밝은 성격은 아니었다. 주인공에게 늘 유쾌한 일만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명랑함은 한 장면으로 충분했다. 어떤 순간의 말, 표정, 손짓 같은 것 하나만으로도 명랑한 삶을 꿈꿔볼 수 있었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보며 어릴 때 읽었던 명랑소설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밝은 성격도 아니고, 늘 유쾌한 일만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의 소설엔 웃음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날마다 만우절>을 읽고 나서 <악스트> 인터뷰를 읽었는데 마침 이런 대목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소설이 되었든지 모든 소설에 웃는 장면을 하나씩 만들자.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웃는 장면을 넣게 되고. 그러다 보니 괜찮다, 착하다, 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되고. 나는 인물들에게 그런 장면을 선물처럼 주고 싶어요.” 그래, 내가 읽고 싶었던 소설은 이런 거였어.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데뷔했다. 나는 <감기>, <베개를 베다> 같은 소설집 제목이나 ‘OO문학상 수상’ 등의 소식으로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정작 소설은 읽은 적이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윤성희’라는 이름을 몇 번 검색했다. 검색 결과, 윤성희 작가가 단독으로 펴낸 책은 모두 9권이었다. 나는 기뻤다.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을 처음 알게 됐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겠지?

  •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 문학동네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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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