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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의 레이더] 유체이탈자의 공간여행지 5

안녕. 디자인·건축 글을 쓰는 전종현이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유체 이탈’이다(응?). 최면술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올 법한 정도의 유체 이탈은 아니지만, 일단...
안녕. 디자인·건축 글을 쓰는 전종현이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유체 이탈’이다(응?). 최면술을 다루는…

2021. 08. 09

안녕. 디자인·건축 글을 쓰는 전종현이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유체 이탈’이다(응?). 최면술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올 법한 정도의 유체 이탈은 아니지만, 일단 육체에서 정신이 분리되어 요리조리 움직였으니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격정적 표현으로 ‘유체 이탈’만큼 좋은 단어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글은 게으른 베짱이의 고백이다. 유체 이탈한 정신이 정신없이 움직이던 매개가 1년 전에 구입한 공간 관련 책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더 터치: 머물고 싶은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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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 책을 구매했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건 하나 살 때 굉장히 신중히 결정하는 타입이라, 2만 9,800원짜리 책을 냉큼 사려면 그만큼 내 혼을 빼놓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하지만 체험형 소비에는 매우 쉽게 지갑이 열린다…) 책을 실제 보지도 않았는데 온라인 구매 버튼을 누를 수 있던 용기는 글쓴이와 출판사, 그리고 주제였다. 공동 저자인 ‘킨포크Kinfolk’와 ‘놈 아키텍츠Norm Architects’는 개성 있는 감각으로 워낙 유명한 데다, 원서는 예술 전문 출판사 ‘게슈탈텐gestalten’에서 나왔고, 이 특징을 살려 한국어판으로 냈다고 하니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엇보다 이 세 곳의 교집합인 책의 소재가 감각을 건드리며 다층적인 감동을 주는 전 세계 공간 25곳이라면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문제는 구매 완료 후 배송이 왔을 때 정신없이 일하던 상태라 책상 위에 잠시 올려둔다는 게 몇 달이 지나자 내 마음에 압박을 주는 물건으로 변신했다는 데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책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얼른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늦은 만큼 제대로 읽어서 책의 정수를 흡수하고 말겠다는 어리석은 마음가짐으로 방치한 지 1년이 지나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폭염이 너무 심해서 에어컨으로 방어를 하며 글을 쓰다가 갑자기 우울감이 찾아왔다. 주말에 글을 쓴다는 게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다. 심리적 박탈감과 허무함에 글 쓰는 걸 멈추니 정신적인 빈곤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절박감 속에 내 눈에 띈 물건이 바로 이 책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집어 들고 침대에 누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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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종의 여행이었다. 에어컨과 폭염의 사투가 만들어낸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정신은 끝없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말 그대로 육체를 떠나 책에 달라붙었다.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내 정신은 책의 레이아웃과 사진들을 통과하며 여정을 지속했다. 사진 속 공간을 들르며 그곳의 분위기에 흠뻑 빠졌는데 단순히 시각적 만족이 아니라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 곁에 내가 머무는 듯 풍경과 빛, 형태, 온도,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햇살, 바람 소리, 풀 내음, 파도, 온기, 시원함, 절경을 순간이동하며 집약적으로 받아들였다. 책을 넘길 때마다 계절과 공간은 달라졌고, 어둡고 차가운 콘크리트에서 열대의 습기 어린 바닷가의 안개로, 추운 겨울에서 풍요로운 가을로, 온순한 안식처와 고요한 무덤까지 내 정신의 움직임에 한계란 없었다.

전 세계 25곳을 다 돌고 나니 내적인 충만감에 휩싸이며 정신이 든든해졌다. 책이 하나의 이공간처럼 느껴진 건 난생처음이었다. 믿기지 않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지만, 1주일 동안 휴가를 훌쩍 다녀온 기분이라 머리에 신선한 기운이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아마 내가 책을 꺼낸 게 아니라, 책이 나로 하여금 자신을 꺼내게 만든 건 아닐까. 1년간의 기다림 끝에 자신을 넘겨보라며 나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확신했다. 킨포크와 놈 아키텍츠가 고른 공간들은 단순히 보기 좋은 곳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보고 느낀, 진실로 감각을 일깨우는 곳이란 사실을. 이번 글을 읽고 비슷한 체험을 기대하며 책을 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나도 정말 우연찮게 생긴 일인걸. 무엇보다 탁월한 사진과 정보, 큐레이션 덕분에 책 구매를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더 터치: 머물고 싶은 디자인>에서 소개하는 장소들은 총 5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빛light, 자연nature, 물질성materiality, 색color, 공동체community다. 각 카테고리에서 내 마음을 흔든 곳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선정 이유는 따로 없다. 내 정신이 강하게 반응했다는 공통점 말고는. 놈 아키텍츠가 손댄 북유럽 건물이 세 곳이나 들어간 것도 이 글을 쓰면서 발견했다. 흠칫 놀랄 정도로 내면의 취향이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PH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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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시각적 감각만을 뜻하지 않는다. 열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쬐다 보면 따스함이 피부를 감싼다. 빛이 잘 드는 방은 만지기 좋은 온도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빛은 공간의 분위기를 시시각각 바꾼다.” – ‘빛’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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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PH 하우스’는 현대 조명의 개척자로 불리는 폴 헤닝센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던 역사적인 곳을 한 가족이 머무는 집으로 바꾼 곳이다. 화재로 훼손된 집은 세 식구의 삶터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역사성을 고려해 집의 외관과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필요에 따라 방들을 나누던 작은 벽들을 허물고 커다란 거실에 빛을 가득 들여왔다. 한낮의 빛은 집 안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흐르며 더 밝고, 환하고, 섬세하게 분위기를 바꾸고, 기분까지 북돋는다. 아마 여기에 내 정신이 오래 머문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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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HINOYA KY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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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우리를 현재의 순간에 머물게 한다. 비를 예로 들면, 뚝뚝 떨어지는 소리, 피부에 닿는 감촉, 비 온 뒤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떠오른다. 집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려면 살아 있는 것들, 즉 생명을 안으로 들여야 한다.” – ‘자연’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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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료칸으로 시작한 가족 회사인 호시노 리조트는 4대째인 2000년대에 들어서 일본 호스피탈리티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기업이 되었다. 호시노야는 호시노 리조트의 플래그십 브랜드로 일본 각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일본이 자랑하는 환대 문화인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를 현대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하이엔드 럭셔리 리조트다. 일본 전통의 심장인 교토 외곽에 자리 잡은 ‘호시노야 교토’는 느린 돛단배 한 척을 타고 구불구불한 강을 15분 정도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이곳은 거대한 자연보호구역인 아라시야마 공원에 숨어 세상과 단절하는 것을 택했다. TV와 시계가 없어 외부의 소식과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버린 상황에서, 강물에 비치는 햇빛으로 하루의 때를 가늠하고 풀벌레와 새,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벗 삼아 일상에서 완전히 분리된다. 가을 단풍이 든 계절 한가운데 깊숙이 빠져 폭염과 에어컨의 존재를 잊은 채 신비롭고 조용한 침묵을 경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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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JØVIK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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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성은 정교함, 감촉, 기억 등과 좀 더 밀접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는 나무, 가죽은 만지고 싶은 질감에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진 그윽한 멋을 풍긴다.” – ‘물질성’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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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크 하우스’는 노르웨이의 북방 지역인 예비크 마을의 미에사 호숫가에 있는 집이다. 사생활과 평온함을 중시하는 지역 특색을 살리면서도 6개의 각기 다른 구조물들을 이리저리 겹치며 주택 일부가 서로 통하게 했다. 사람들은 공간 구석마다 존재하는 틈에서 조용히 사생활을 영위하면서도 함께 사는 이들의 존재를 느낀다. 그 사람의 행동이 보이는 공간에 있지 않아도 서로가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회색 콘크리트, 흰색 돌, 나무를 주재료로 만든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창문이다. 자작나무 사이로 보이는 주변 풍경, 눈 쌓인 대지는 자연을 내부로 가져오는 느낌을 준다. 특히 모든 방에서 노에사 호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과 집, 집과 사람, 사람과 자연에 유대감을 안긴다. 이가 시릴 정도로 춥고 영원히 말소될 것처럼 하얀 풍광을 따스한 마음과 평온한 몸으로 접하며 경쾌하고 시원한 여정의 길목 역할을 충실히 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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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IDE AB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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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색이라고 하면 페인트칠을 떠올리지만, 사실 일종의 질감을 더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건축가는 색을 부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공간의 물질성을 확장하는 것으로 본다. 색을 통해 집과 자연환경을 하나로 연결할 수도 있다.” – ‘색’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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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지은 집은 모래사장과 바다의 햇살 가득한 풍경을 반영해 색 팔레트를 짜곤 한다. 하지만 덴마크 코펜하겐 북쪽 해안선에 위치한 ‘시사이드 어보드’는 얼룩덜룩한 회색과 베이지, 갈색 등 주변과 같은 색채를 입어 경관을 위협하지 않는다. 밝은 원색을 활용한 단정적인 디자인을 거부하면서 집과 가구에 가려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온전히 반짝이는 새집이 아니라 비바람에 퇴색하고 풍화된 듯 자연스러운 느낌을 강조한 덕분에 근사하게 낡고 더욱 아름다워지는 삶의 윤기가 흐른다. 그 윤기야말로 언제든지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는 익숙함이자 매번 새로운 것을 접해야 하는 내 마음에 대한 배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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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A BR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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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이 아름답지만 불편하다면 주요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함께하게끔 디자인하는 일은 전례 없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디자인은 모든 것을 묶는 풀처럼 기능한다.” – ‘공동체’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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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산 자를 위한 곳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곳이다. 베네치아 북서쪽 작은 마을 산 비토 디 알티볼레의 외딴 구석에 있는 묘지인 ‘톰바 브리온’은 접근성 때문에 더욱 산 자와 멀리 있다. 하지만 이곳을 지은 카를로 스카르파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길 희망했다고 한다. 그의 장기인 시적인 건축이 방문자와 교감하며 산 자를 위한 보편적인 곳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1969년 이탈리아 전자업체 브리온베가의 창업자인 주세페 브리온이 사망하고, 그의 아내 오노리나가 만들어주길 청한 이후 1970년부터 1978년 죽을 때까지 스카르파의 노력이 담긴 묘지에는 결국 오노리나와 스카르파도 함께 잠들었다. 현대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재료인 콘크리트는 건축가의 솜씨에 맞춰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자연에 빠르게 순응하는 형태로 구축됐다. 지어진 지 40여 년이 지난 톰바 브리온은 고대 유적의 풍채를 낸다. 삶과 죽음, 시간에 대해 고요한 성찰이 이는 가운데 내 정서를 건드린 정체는 햇빛이었다. 쨍하지도, 희미하지도 않은 자연광은 모든 경계가 사라진 평온함을 품고, 있는 그대로 왈칵 가슴에 스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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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모든 이미지는 Die Gestalten Verlag GmbH & Co. KG와 독점으로 계약한 (주)월북에 한국 내 저작권이 귀속됩니다. 『더 터치: 머물고 싶은 디자인』의 소중한 자료를 제공한 (주)월북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About Author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디자인, 건축, 예술 관련 글을 기고한다. '중소기업을 전전하며 손기술로 먹고산다'는 사주 아저씨의 말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