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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처럼 안 풀린 태그호이어의 야심작

안녕하세요. ‘생활인의 시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생활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태그호이어의 오타비아 칼리버 5는 본격적으로 소비자에게 선보인 지는 1년이 갓 넘은...
안녕하세요. ‘생활인의 시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생활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태그호이어의 오타비아 칼리버…

2021. 05. 23

안녕하세요. ‘생활인의 시계’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생활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태그호이어의 오타비아 칼리버 5는 본격적으로 소비자에게 선보인 지는 1년이 갓 넘은 모델입니다. 그래서 이 모델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은 조금 이른 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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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까지의 추세만 보면 엄청난 대박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2019년에 바젤월드를 통해서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받았던 시계이고, 저 역시 상당히 궁금해했던 시계였던지라 생각보다 미지근한 반응에 마음이 좀 아픕니다.

오늘은 태그호이어라는 역사적 브랜드에게 오타비아 칼리버 5라는 새로운 모델이 어떤 의의를 가진 기획이었는가 살펴보면서, 예쁘고 잘 만든 이 시계가 왜 기대만큼 시장의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그호이어의 창립과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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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어의 전성기 시절 사옥]

요즘은 태그호이어가 시계 커뮤니티에서 이상한 별명으로 불리면서 놀림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놓고 봤을 때 태그호이어는 그 어떤 시계 회사랑 비교해도 무시당할 이유가 없는 브랜드입니다. 특히 크로노그래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태그호이어보다 더 중요한 시계 회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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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 에두아르 호이어]

태그호이어 출범 당시 이름은 ‘호이어(Heuer)’였고, 에두아르 호이어(Edouard Heuer)라는 인물이 1860년에 설립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설립된 회사니까 상당히 전통 있는 회사이고, 아주 오래 전부터 정밀한 스탑와치를 만드는 걸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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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그래프와 1/1000초까지 측정 가능한 마이크로스플릿]

예를 들어 다른 회사는 5분의 1초 단위 정도에 만족하던 1916년에 이미 호이어는 ‘마이크로그래프’라는 100분의 1초 단위까지 잴 수 있는 엄청난 정밀성을 가진 기계식 스탑와치를 만들었습니다. 이 마이크로그래프는 당대의 스탑와치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정밀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올림픽 위원회가 호이어에게 먼저 마이크로그래프를 경기용 시계로 활용하기 위해서 초청장을 보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1400_1400_60[60년대 호이어 카탈로그]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는 기계식 크로노그래프가 가장 큰 호황을 누리던 시기입니다. 원래부터 크로노그래프, 그러니까 스탑와치에 일가견이 있던 호이어는 이 시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도 태그호이어는 인기가 높은 브랜드이지만, 당대의 호이어는 지금 정도가 아니라 시계 업계의 1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정상급 브랜드였습니다. 이 당시 호이어 관계자한테 누군가가 “너네는 아무래도 롤렉스보다는 못한 거 같아” 같은 식의 이야기를 했다면 진심으로 서운하게 들었을 겁니다.

1400_1400_1400_fmakd[영화 <르망>에 나오는 모나코 1133B]

전성기 시절 빈티지 호이어 시계들은 지금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비싸게 거래가 되고 있고, 해마다 최고가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63년과 70년 사이에 나왔던 1세대 수동 까레라라던가, 베젤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60년대의 오타비아 모델들, 70년대에 스티브 맥퀸이 영화 <르망>에 차고 나왔던 모나코 1133B 같은 모델은 수많은 수집가들이 너도나도 찾는 시계입니다.


드디어 부활한 오타비아!
그런데 왜 이게 오타비아야?

1400_1400_worghdldj copy[잭 호이어와 그의 첫 번째 제품 오타비아]

호이어의 최전성기를 대표하는 3대 컬렉션은 결국 까레라, 오타비아, 모나코라고 요약할 수 있을 텐데요. 이상하게도 오타비아는 그 대표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태그호이어의 카탈로그에서 정규 컬렉션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손목시계로서의 오타비아는 호이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경영자 잭 호이어가 기획한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고,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약한 인기 모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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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몇 년 전부터 태그 호이어는 오타비아를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1966년 모델번호 2446번 ‘요헨 린트’의 디자인에 인하우스 엔진을 실은 오타비아 크로노그래프 모델이 지난 2017년에 출시되어서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고요. 2019년에는 바젤 월드를 통해서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빠지고 시분초침만 남은 오타비아 칼리버 5가 선을 보였습니다.

오타비아가 드디어 한정판이 아니라 정규 컬렉션으로 편입됐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지만, 오타비아 칼리버 5의 출시 소식은 크고 작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우선 ‘과연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없는 오타비아를 제대로 된 오타비아라고 할 수 있는가’가 골수 호이어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습니다.

1400_1400_1400_Rkfpfk[왼쪽은 까레라, 오른쪽은 모나코]

하지만 태그호이어는 이전에도 시간 기능만 남긴 까레라와 모나코를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특히 까레라 쓰리핸즈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으니까, 오타비아도 그렇게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요.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제외한 걸 이해하고 나서도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오타비아 칼리버 5가 60년대나 70년대의 오타비아와 그리 많이 닮지 않았다는 점일 겁니다.

1400_60_ 2446m[왼쪽은 60년대 출시된 2446M, 오른쪽은 오타비아 칼리버 5]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타비아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레이싱 시계입니다. 하지만 오른쪽 오타비아 칼리버 5의 외양을 보면 레이싱 시계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첫인상은 밀리터리 파일럿 시계나 다이버 시계의 디자인에 더 가깝습니다. 크로노그래프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라도, 왜 이 시계가 오타비아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가 썩 직관적으로 이해되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새 오타비아를 통해
태그호이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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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태그호이어 측에서는 오타비아 칼리버 5로 실현하고 싶었던 게 상당히 많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동안 태그호이어는 전성기 시절의 시계로부터 크게 영감을 받은 모델들을 헤리티지 라인업이라고 부르면서 지금의 브랜드명인 ‘태그호이어’ 대신에 과거에 쓰던 이름인 ‘호이어’를 다이얼에다 프린트해왔는데요.

이번 오타비아 칼리버 5는 다이얼에다 태그호이어라는 현행의 로고를 프린트했습니다. ‘전성기 호이어의 오타비아’를 그대로 재현한 시계를 만들기보다, 현재의 태그호이어의 역량으로 새로 상상한 ‘우리 시대의 오타비아’를 만들겠다는 제작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인데요. 호이어의 유산은 존중하지만 더 이상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시계회사가 되지 않겠다는 태그호이어의 진취적인 태도를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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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작 의도가 있다는 걸 이해한 다음 시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브랜딩만큼이나 새 오타비아의 디자인에 상당히 큰 야심이 담겨 있다는 게 보이실 겁니다. 레트로적인 디자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얼핏 보면 옛날 시계를 그대로 갖고 온 게 아닌가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러한 디자인 요소들을 굉장히 오리지널하게 조합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합이 임의적이지 않고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게 재밌는 점입니다. 오타비아라는 모델의 역사뿐만 아니라, 태그 호이어 브랜드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전유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다 브론즈나 세라믹, 티타늄 같은 현대적인 소재와 색감을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오타비아 시리즈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전유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잠시 부연을 드리자면, 흔히 오타비아라고 하면 잭 호이어가 62년에 만들어서 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호이어의 카탈로그에 오타비아라는 이름은 1933년부터 존재했습니다.

1400_30[30년대 호이어가 제작한 계기판 시계]

원래 30년대의 오타비아는 손목 시계가 아니라 자동차와 비행기의 계기판에 들어가는 시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호이어는 ‘자동차’를 뜻하는 오토모티브(automotive)에서 aut를 따오고 ‘항공’을 뜻하는 애비에이션(aviation)에서 avia을 따와서 오타비아(aut+avia)라는 신조어를 만든 건데요. 따라서 오타비아라는 계기판 시계는 출발부터 레이싱 시계와 항공 시계를 겸하는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00_1400_30_5[왼쪽은 30년대 계기판 시계, 오른쪽은 오타비아 칼리버 5]

태그호이어는 오타비아를 시분초침만을 가진 시계로 새롭게 상상하면서 원래의 이름에서 항공 시계라는 측면을 더 강조해 보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 유명한 60년대의 크로노그래프 보다는, 망각 속에 묻혀 있던 30년대 계기판 시계의 디자인을 끄집어 내서 다이얼의 레이아웃을 구성했습니다. 무엇보다 큼지막한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들과 철도 모양의 챕터링은 이 시계가 30년대 호이어의 계기판 시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세 시 방향에 위치한 8mm 지름의 커다란 크라운도 계기판 시계의 것입니다.

오타비아의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로부터 호이어의 계기판 시계뿐만 아니라 호이어가 1930년대에 만들던 파일럿 크로노그래프를 연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 만들었던 레이싱 크로노그래프가 워낙 유명해서 오늘날에는 다소 잊힌 감이 있지만, 30년대에는 호이어도 괜찮은 파일럿 크로노그래프들을 만들었습니다.

1400_1400_1930_ 5[왼쪽은 30년대 호이어 파이럿 크로노그래프. 오른쪽은 오타비아 칼리버 5]

항공시계 풍의 레이아웃으로 오타비아의 다이얼을 꾸리면서 태그호이어는 레이싱 시계이면서 항공 시계이기도 했던 오타비아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부각하고, 아울러서 파일럿시계 메이커로서의 브랜드의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조명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게 오타비아의 역사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역사까지도 재전유를 해보려고 한 거지요.

1400_69png[6시 방향에 있는 69년도 오타비아 모델의 날짜창 위치]

물론 60년대의 유명한 크로노그래프 오타비아를 오마주한 부분도 있습니다. 모서리에 45도 빗면 처리가 된 특유의 케이스의 윤곽과 촘촘한 미닛 마커가 들어간 베젤은 모델번호 2446M으로부터의 영향이 상당히 많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1968년부터 오타비아에 들어가기 시작한 여섯 시 방향의 날짜창도 뭔가 고증한 것처럼 같은 방향에 살려 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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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시기의 오타비아로부터 디자인 요소들을 빌려왔지만 과거에만 얽매이지는 않았습니다. 케이스의 사이즈는 현대적인 다이버 시계나 파일럿 시계처럼 42mm로 키웠고, 현대적인 파일럿 시계의 소드형 시분초침을 매칭시켰습니다.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옆에 각진 금속 인덱스를 설치하고 챕터링을 솟아오르게 만들어서 고급스럽게 입체감을 부각하려고 했고요. 그동안은 제니스나 론진의 시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포 파티나 연출도 볼 수 있는데요. 모래 알갱이 같은 질감에 스모키 이펙트를 적용한 그라데이션 다이얼을 채택하고 있는 게 의외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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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스펙은 현대적인 스포츠 시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다이버 시계는 아니어서 스크루다운 크라운을 넣지는 않았고, 60클릭 베젤은 양방향으로 다 움직입니다. 하지만 100m의 신뢰할 수 있는 방수 성능을 갖췄고, 베젤의 클릭감이 유격 없이 아주 묵직하면서도 경쾌해서 레트로 풍의 다이버 시계를 찾는 사람들까지 겨냥할 수 있는 시계로 제작을 했습니다. 두께도 돔형의 시계 유리를 포함해서 13.5mm로 크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슬림하게 뽑아냈습니다.

스펙에 어울리게 요즘 트랜디한 소재로 떠오른 브론즈, 티타늄, 세라믹 같은 소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습니다. 이 가격대에서 양면에 무반사 처리가 된 사파이어 크리스탈 시계유리는 그리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베젤을 유리 같은 광택을 가진 글로시한 세라믹으로 만든 건 꽤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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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뿐만 아니라 화면에 보이시는 것처럼 브론즈 케이스를 적용한 오타비아가 나온다는 것도 생각해 볼 거리인데요. 반짝거리는 로즈골드 빛깔에서 시작해서 사용자의 습관에 따라 서서히 색상이 변하는 다른 회사의 브론즈 케이스랑 달리, 오타비아는 미리 파티나가 일어난 것처럼 어둡게 그을린 효과를 입혀 놓은 대신에 더 이상 색깔이 변하지 않게 처리한 게 독특한 점입니다. 케이스백은 티타늄 소재를 사용해서 무게를 줄이고, 피부 알레르기 등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려는 배려를 했습니다.


왜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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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2019년의 새 오타비아는 이렇게 오타비아라는 이름을 정규 컬렉션에 편입시키면서도 과거의 영광에 기생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자신감 있게 블렌딩해서 미래로 도약해 가겠다는 태그호이어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태그호이어라는 브랜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오타비아 칼리버 5라는 신제품의 성패는 중요했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안타깝지만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델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대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원인을 기획과 커뮤니케이션, 생산 및 유통 차원으로 나눠서 분석해볼 수 있을 텐데요.

[1]
위험부담이 컸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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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기획 자체가 위험 부담이 큰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계 시장은 그 어떤 제품의 시장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디자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대부분의 럭셔리 시계들은 적어도 수십년 전에 정립된 디자인을 점진적으로 수정해가면서 지금의 형태로 자리를 잡은 것들입니다. 때로는 케이스의 사이즈를 1-2mm 바꾸거나, 베젤이나 케이스의 소재를 바꾸는 것, 시분침의 디자인을 바꾸는 것, 다이얼 프린트 한 줄의 크기를 바꾸는 것까지 역풍을 맞을 정도로 시계 팬들은 엄격하고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을 갖고 와서 밀어 부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물론 오타비아처럼 단종된 컬렉션을 복원하는 경우에는 직전 모델이 없었으니까 여러 시기의 모델들을 메시업해서 비교적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기틀이 될 만한 과거 모델을 바탕에 놓고 비슷한 시기의 디자인을 섞지, 오타비아처럼 30년대의 계기판 시계와 60년대의 크로노그래프를 현대적인 디자인과 섞는 식으로 급진적인 접근을 취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게다가 보통 신작은 무난하게 검은 다이얼 내지 파란색 다이얼의 스틸 케이스 모델로 출시한 다음 자리를 잡으면 다른 색상이나 소재로 확장해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오타비아 칼리버 5는 처음부터 알록달록 스모키 이펙트가 적용된 다이얼에다가 브론즈 케이스까지 과감하게 공개를 해버렸습니다. 이건 뭐 용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획인 겁니다.


[2]
제품의 취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빈약한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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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이고 용감한 기획이니까 소비자들에게 이 시계의 취지를 잘 설명하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을 겁니다. 새 오타비아는 별로 마케팅의 덕을 보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태그호이어를 마케팅을 잘 하는 회사라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의외라고 생각하실 텐데요. 물론 태그호이어가 그동안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을 앞세워서 특히 명품을 처음 접하는 젊은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어필해왔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브랜드가 브랜드의 비전을 시계 팬들한테 희망찬 어조로 전달하거나, 시계 하나하나의 스토리텔링을 섬세하게 설명하는 회사는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태그호이어는 오타비아 칼리버 5를 놓고 미디어에다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스스로도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태그호이어의 시계답게 출시 소식과 함께 전 세계의 미디어를 통해 노출은 많이 되었습니다. 마케팅 비용도 많이 썼겠죠. 하지만 제 눈으로 봤을 때는 오타비아를 소개하는 여러 기사들에서 디자인의 주된 취지가 뭔지, 왜 이 시계가 오타비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이걸 파일럿 시계로 밀어야 할지 레이싱 시계로 소개해야 할지도 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느낌마저 있었습니다.


[3]
생산 및 유통 과정에서
일어난 결정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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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 소식이 전해진 다음 제때 매장에 제품이 전달이 될 수 있었다면, 그래도 어쩌면 오타비아 칼리버 5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델이 생산이 되어서 실제 유통이 되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순탄하지 않았던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오타비아 칼리버 5는 2019년 1월부터 바젤월드가 있는 3월말까지 미디어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홍보를 했으니까 보통 제품은 늦어도 5월 정도면 태그호이어 매장에 다 전개가 되어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타비아 신제품은 무슨 시범 판매를 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일부 매장에만 물량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되짚어 보면 이때부터 태그호이어가 원하는 만큼 제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고,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해 여름에는 갑자기 모든 매장에서 오타비아 제품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당연히 미디어와 시계 커뮤니티에서는 태그호이어 측에다 새 오타비아가 사라져 버린 이유를 물어보겠죠.

많은 사람들은 태그호이어가 야심차게 준비한 카본 헤어스프링이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냐고 추측을 했습니다. 카본 컴포짓 소재는 자성이나 중력, 충격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꿈의 소재에 가깝습니다만, 가공하기가 워낙 힘들고 어지간 해서는 다른 소재와 접착이나 결합이 잘 안 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브먼트에서 가장 섬세하고 까다로운 파트인 헤어스프링을 카본 소재로 만들어서, 대부분의 파트가 스틸로 이루어진 셀리타 무브먼트랑 결합하겠다는 계획은 좀 무모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처음부터 있긴 했습니다.

결국 2019년 9월 태그호이어 측에서 지금의 설계를 엄격한 품질 기준에 따라 대량생산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히면서 문제가 카본 헤어스프링에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결국 그해 가장 주목받았던 신제품을 본격적으로 판매되기도 전에 공정 상의 문제로 제조사가 회수를 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건데요. 태그호이어는 다음 해인 2020년 초에 카본 헤어스프링을 포기하고, 일반 셀리타 무브먼트를 장착한 다음 가격을 500불 정도 내려서 오타비아 칼리버 5를 다시 내놓습니다. 하지만 신제품을 처음 마주하는 흥분된 분위기를 소비자들 사이에서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었겠죠. 식당도 개업빨(?)이 있는 것처럼, 신제품도 출시빨(?)이 있는 건데, 오타비아 칼리버 5는 출시빨을 거의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카본 헤어스프링이 제외되면서 제일 매력적인 기믹 중 하나가 빠져버린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여전히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무브먼트니까 정확도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혁신적이라거나 새롭다는 느낌은 덜한 게 사실입니다.


결론

리뷰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요즘은 잘 자리잡은 시계 회사들도 다들 인기 모델에다 색깔이나 사이즈 정도만 바꾸는 소심한 변화를 취하는 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과물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과감하고 위험부담이 큰 신제품이 평가받는 분위기가 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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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비아 칼리버 5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더 멋진 시계이고, 42mm 사이즈라고 나와 있지만 체감은 상당히 컴팩트하게 느껴져서 가는 손목에도 충분히 찰 만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몇 년 전에 태그호이어가 밀었던, 이게 위블로야 태그호이어야 싶었던 현란하고 화려한 시계들과는 결이 다른 진지하고 실체감 있는 느낌의 시계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살까 말까 고민도 했던 시계입니다. 아마 이 시계가 성공했다면 시계 팬들 사이에서 태그호이어의 이미지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한 두 가지 정도 불만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우선은 이 시계에다 오타비아라는 네이밍을 하는 것이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오타비아라는 이름을 유지할 거면 파일럿이나 항공 시계를 떠올릴 수 있는 좀더 직관적인 서브브랜딩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둘째로 색깔이 변하지 않는 브론즈 케이스라는 건 큰 의미가 없는 건데, 선처리를 해놓고 산화가 안 되도록 만들 거면 왜 브론즈 케이스를 굳이 채택한 건지 불만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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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몇 가지 불만 사항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최근 몇 년간 본 태그호이어 시계 중에서 가장 의외의 시계이면서, 가장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시계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략을 잘 짜서 나왔다면 분명히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안 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 엇나가버린 게 좀 슬픕니다. 물론 뒤늦게라도 조명을 받아서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단종된 다음에 저주받은 걸작으로 나중에 수집가들이 찾는 희귀 모델이 될지도 모르죠. 이 모델의 미래에 대해서 너무 빨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일이겠습니다만, 현재까지는 좀 부진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이 추세라면 저주받은 걸작까지는 모르겠지만 비운의 수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여러분들은 이 시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매력
– 그동안 태그호이어에서 보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항공시계 풍 디자인

특별한 단점
– 음… 너무 파격적인가?

한 가지를 바꾼다면?
– 브론즈 케이스를 채택할 거면 케이스 색상은 사용자의 습관에 따라 변화하도록 놔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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