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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스탁스로 사진을 뽑는 이유

“사진이 뭘까요?” 시작부터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이냐고 하겠지만 이게 요즘은 의외로 꽤나 철학적인 고민거리입니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조금은...
“사진이 뭘까요?” 시작부터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이냐고 하겠지만 이게 요즘은 의외로 꽤나…

2021. 04. 26

“사진이 뭘까요?”

시작부터 무슨 뚱딴지 같은 질문이냐고 하겠지만 이게 요즘은 의외로 꽤나 철학적인 고민거리입니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실 수 있을 겁니다.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 물체로부터 오는 광선을 사진기 렌즈로 모아 필름, 건판 따위에 결상(結像)을 시킨 뒤에, 이것을 현상액으로 처리하여 음화(陰畫)를 만들고 다시 인화지로 양화(陽畫)를 만든다.”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한 결과인데, 적어도 이 사전에서 사진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는 필름 사진이 대세일 때였나 봅니다. 원래 사진은 필름같은 감광 매체에 빛을 쐰 뒤, 이걸 다시 사진 용지에 현상한 결과물을 말합니다. 필름 이전에는 천연 아스팔트에 빛이 닿으면 마르는 원리를 이용해 사진을 찍기도 했고, 은을 도금한 동판에 화학처리를 한 뒤 빛을 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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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사진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1889년 코닥이 요즘과 비슷한 셀룰로이드 소재의 필름을 말아서 판매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된 2000년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진이라고 하면 으레 필름으로 사물을 찍는 행위, 그리고 필름을 인화지에 뽑아낸 결과물로 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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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은 ‘사진’이라고 하면 어떤 형태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스마트폰 안에, 소셜 미디어 속에 담겨 있는 파일 형태의 디지털 사진일 겁니다. 돌아보면 초기에는 디지털카메라의 존재 이유가 필름을 대신해 인화할 사진을 찍는 쪽에 가까웠지만 이제는 종이에 뽑은 사진을 보는 일이 아주 드물죠. 아마 우리가 찍는 사진 중에서 실제로 인화지에 종이로 뽑혀 나오는 것은 100장에 한 장? 아니 증명사진 정도를 빼면 1년 내내 종이 사진은 한 장도 뽑아보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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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의 등장 이후, 그리고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그 의미는 서서히 바뀌어 왔습니다. 아니, 여전히 인화된 사진의 가치는 있으니까 그 의미가 넓어졌다고 보는 편이 맞겠네요. 사진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달라졌고, 소비되는 방법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요즘의 사진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보다 ‘컴퓨터에서 보는 파일’로 더 잘 통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썼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종이로 뽑아 보는 사진은 그 가치까지 사라진 걸까요?

괜히 옛날의 추억을 끄집어내서 억지로 가치를 부여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진을 뽑아서 본다는 건 여전히 그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직접 사진을 많이 찍지만 매년 가족사진을 스튜디오에서 따로 찍습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인화하고, 액자로도 뽑아 둡니다.

그리고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내는 수많은 사진들은 모두 하드디스크와 클라우드 서비스, 그러니까 구글 포토에 올려 둡니다. 구글 포토는 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개인이 사진을 보관하고, 관리하고, 즐기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재미있는 도구입니다. 수많은 사진이 담기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은 언제든 열어볼 수 있도록 즐겨찾기 표시를 해 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바로 뽑아 둡니다.

뭘로 뽑냐고요? 후지필름의 인스탁스 쉐어로 뽑습니다. ‘광고를 위한 빌드업이 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광고도, 후지필름의 부탁도 전혀 아닙니다. 갑자기 마주친 사진 한 장이 저를 키보드 앞에 앉혔고, 뜬금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수줍은 고백을 앞둔 아이처럼 빙빙 말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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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을 인스탁스로 뽑아 둔 사진들이 지금도 낡은 책을 정리하다가 한두 장씩 툭툭 튀어나오곤 합니다. 그때마다 흐릿하고 이제는 색도 번지는 이 사진이 주는 기억은 ‘우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디지털 사진이 절대 만들어내지 못하는 뒷맛을 남깁니다.

물론 오래 전 하드디스크를 뒤지면 더 좋은 화질의 원본 사진 파일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아, 그 중에는 관리를 엉망으로 한 탓에 두 번 다시 찾지 못하는 사진도 적지 않습니다. 디지털의 온전함과 완벽한 휘발성은 기록에 대해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남기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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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저는 이 즉석 사진을 꽤 즐겨 썼습니다. 기록을 남긴다거나, 감성을 자극하는 따위의 멋진 이유가 아니라 반쯤은 내가 찍은 사진을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뽑았고, 반쯤은 인화를 맡기고 기다려서 사진을 받아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이 가려져 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지금은 그 사진들이 기록이 되었고, 감성을 자극하다 못해 뚫어질 것 같은 생각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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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즉석 사진은 마치 ‘대일밴드’나 ‘포클레인’, ‘호치키스’처럼 ‘폴라로이드’라는 이름으로 더 잘 통합니다. 폴라로이드는 즉석 사진기를 처음 만든 회사의 이름이죠. 그리고 지금은 파산과 인수 합병 이후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는 정도입니다. 즉석 사진의 패권이 후지필름의 인스탁스 브랜드로 넘어간 지는 적어도 10년은 넘었을 겁니다. 이렇게 호랑이 가죽처럼 제품은 사라져도 브랜드는 남나 봅니다.

저는 사실 즉석 카메라로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제 즉석 사진은 대부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프린트한 것들입니다. 화질 때문입니다. 지금 쓰는 기기는 ‘인스탁스 셰어 SQ3’를 씁니다. 얇고 기다란 사진이 아니라 정사각형의 ‘인스타그램스러운’ 사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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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사진에 화질이 뭐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합니다. 물론 지금의 인스탁스 프린터들도 그렇게 화질이 좋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일반 인화지처럼 화사하고 쨍한 사진을 낸다면 또 그 맛이 없겠죠. 인스탁스의 프린터는 딱 그 중간, 그러니까 ‘엄청 화질 좋은 즉석 사진’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스마트폰 놔두고 크고 무거운 디지털카메라를 뭐하러 들고 다니냐”던 사람들도 인스탁스로 한 장 뽑아주면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 대가는 필름 한 장 값 1천원입니다.

제가 이 인화 시스템을 좋아하게 된 건 오래 전이지만 후지필름에서 내놨던 ‘피비 MP-300’ 때문입니다. 아마 DSLR 카메라로 사진 좀 찍으셨다고 하는 분들은 한번쯤 써보셨을 제품일 겁니다. 이건 네모난 스퀘어 필름은 아니고 일반 인스탁스처럼 긴 비율의 전용 필름을 쓰는데, 카메라에 USB 케이블을 연결해서 뽑는 방식이었습니다. 아주 번거로웠고, 인쇄를 할 수 있는 카메라도 제약이 있었어요.

1_pivi_MP_300_copy_Copy[후지필름 피비 MP-300]

이게 화질이 꽤 좋았습니다. 인스탁스의 느낌은 있는데, 해상도도 높았고, 색은 정확한 건 아닌데 그래도 그 인스탁스 특유의 진한 맛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DSLR 카메라로 찍은 심도 표현과 해상도 쨍한 사진을 인스탁스 맛으로 뽑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지요. 대형 인화 이상으로 사진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는데 필름의 생산이 중단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필름을 살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러면서 기기가 그냥 고물이 되어버립니다. 이걸로 뽑은 사진은 지금 봐도 만족스러운데 너무 아쉽습니다. 야속하게도 기기는 아직도 잘 켜집니다.

아, 그 사이에 진짜 인스탁스 카메라로 특유의 멍~한 사진을 찍기도 했고, 휴대용 포토 프린터도 써봤습니다. 한때 스마트폰과 함께 크게 유행했던 징크(Zink) 기반의 포토 프린터도 샀습니다. 그런데 MP-300이 만들어주는 그 느낌이 안 나더라고요. ‘아니 내가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아니요, 그냥 성격이 까탈로그.. 아니 까탈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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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가 필요 없는 징크 방식의 카메라 ‘폴라로이드 스냅’]

한 2년 전부터 과거의 미련을 버리고 인스탁스 셰어로 갈아탔습니다. 아예 필름도 100장 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프린터를 핑계로 잘 쓰던 소니 카메라를 두고 후지필름의 카메라 X-T30도 샀습니다. 카메라에서 찍고 바로 프린터로 보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핑계도 좋죠. 색이나 선명도 등 조금 더 좋은 화질을 내줄까 싶어서 산 것도 있는데,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글쎄요’이지만 간편함이라는 즉석 사진의 경험을 살리기는 아주 좋습니다.

지금도 인스탁스로 사진을 뽑습니다. 인화를 마음에 두고 찍은 사진은 조금 다르게 찍히는 기분도 듭니다. 그리고 손에 쥐었을 때의 즐거움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언젠가 이 사진들이 제 책상 서랍에서,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 툭 튀어나왔을 때 지금 이 순간이 즉석 사진처럼 뽑혀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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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섭

지하철을 오래 타면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모바일 기기들이 평생 일이 된 IT 글쟁이입니다. 모든 기술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공부하면서 나누는 재미로 키보드를 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