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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코에는 알피니스트가 있다

안녕하세요, 시계 유튜버 김생활입니다. 용감한 탐험가나 등반가를 위해 만들어진 시계라고 하면 어떤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롤렉스의...
안녕하세요, 시계 유튜버 김생활입니다. 용감한 탐험가나 등반가를 위해 만들어진 시계라고 하면 어떤…

2021. 04. 06

안녕하세요, 시계 유튜버 김생활입니다. 용감한 탐험가나 등반가를 위해 만들어진 시계라고 하면 어떤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롤렉스의 익스플로러와 유명한 에베레스트 등반 일화를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세이코에는 그 시계 못지않게 중요한 탐험가용 시계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다룰 알피니스트라는 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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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는 한동안 많은 시계 리뷰어들 사이에서 백만 원 이하 가격대의 시계를 추천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시대의 고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무엇이 알피니스트를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는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파워리저브 70시간(태엽을 감아 시계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자랑하는 이 금빛 케이스의 신모델 SPB210이 알피니스트 시리즈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따져보겠습니다.


1959 로렐 알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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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라는 이름이 세이코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건 1959년입니다. 당시만 해도 세이코의 라인업은 드레스 시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요. 1세대인 ‘로렐’ 알피니스트는 등반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세이코 최초의 스포츠 시계였습니다.

지금의 알피니스트를 봐도 탐험가를 위한 시계치고는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한데요. 최초의 알피니스트도 드레스 시계가 대세였던 당시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드레스 시계의 디자인 같은데, 야광과 방수 성능을 좀 더 강화시킨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세히 보시면 산악용 시계다운 재밌는 디자인 포인트가 있습니다. 3시, 6시, 9시, 12시 인덱스를 마치 산을 나타내는 듯이 삼각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시 방향에는 알피니스트라는 상당히 미래적인 글씨체의 모델명이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1963 챔피언 알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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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는 2세대 ‘챔피언’ 알피니스트가 등장합니다. 은색의 다이얼은 썬버스트 효과를 입힌 듯이 빛나고, 가운데에는 방위표 같은 선이 그어졌습니다. 그리고 섹터 다이얼처럼 가장자리의 검은색의 챕터링에 시간 인덱스가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1세대 알피니스트와 비교하면 좀 더 스포츠 시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다이얼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의 알피니스트는 기본적으로는 방수를 좀 더 강화한 수동 드레스 시계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2세대 알피니스트 이후로 한동안 알피니스트라는 이름은 세이코의 카탈로그에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1995 레드 알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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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게 지나갔다면 알피니스트는 대단치 않은 옛날 시계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세이코는 1995년에 이 이름을 부활시킵니다. 부활한 알피니스트는 다이얼에 빨간색으로 모델 이름을 프린트했기 때문에 ‘레드 알피니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이때부터 어지간한 다이버 시계 못지않은 200m의 방수성능을 갖추게 되고요. 네 시 방향의 용두를 통해 동작하는 컴파스 베젤도 장착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알피니스트는 익스플로러에 필적할 만한 본격적인 전천후 탐험용 시계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당시 세이코는 쿼츠만 만드는 시계 회사라는 세간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알피니스트에 4S15라는 좋은 스펙의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달아줬는데, 요즘의 스위스 무브먼트처럼 시간당 28,800회 진동하는 고진동 무브먼트였을 뿐만 아니라, 수동감기와 해킹 기능, 날짜 퀵셋 기능을 다 제공하는 무브먼트였습니다. 회사의 고가 라인업인 그랜드세이코에 들어가는 무브먼트와도 기본적인 설계가 다르지 않았는데요. 그래서인지 수집가 중에서는 이때 알피니스트가 최고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시분침의 모양, 케이스와 용두의 형태 등 레드 알피니스트가  현대 알피니스트의 기틀을 잡은 중요한 모델인 건 분명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모델은 2년 동안밖에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구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졌습니다.


2003 알피니스트 8F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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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 역사 중에서 쿼츠 알피니스트가 나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3년에 세이코는 티타늄 케이스에다 퍼페츄얼 캘린더 기능과 GMT 기능을 가진 고정밀 쿼츠 무브먼트를 장착한 알피니스트를 선보인 바 있었습니다. 무브먼트의 이름을 따서 별명도 그냥 8F56이라고 불리는 시계입니다. 10년의 배터리 수명과 100m의 방수 성능을 자랑하는 시계였습니다. 아마 관리하기 편한 고성능 쿼츠 시계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알피니스트의 틀 안에서 다 담은 시계였는데요. 세이코는 이렇게 유용하게 잘 만든 시계는 꾸준히 만들지 않고 단종 시켜 버리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이 시계도 이제는 수집가의 아이템이 되어 버렸습니다.


2006 SARB 알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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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번호가 SARB로 시작하는 알피니스트는 2006년에 등장해서 2018년까지 꾸준히 생산되면서 알피니스트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한 모델이었습니다. 특히 녹색 다이얼의 SARB017은 가장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피니스트 하면 녹색 썬버스트 다이얼에 금색의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가 들어간 시계를 떠올리실 텐데요. 재밌는 건 이 시계부터는 알피니스트라는 시리즈 이름 프린트가 다이얼에서는 사라지고 케이스백 엔그레이빙으로 옮겨갑니다.

시간당 21,600회 진동하는 파워리저브 50시간의 6R15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장착하고 200미터의 방수성능과 사파이어 크리스탈로 무장한 이 시계는, 어느 복장에나 착용할 수 있는 멋진 디자인과, 전천후 시계로 활용할 수 있는 뛰어난 스펙으로 오랜 시간 사랑을 받게 됩니다. 저도 시계에 입문할 때 이 시계를 질릴 정도로 추천을 많이 받았었으니까,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시계 중에서 가장 고전이라고 할 만한 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2018년 이후의 알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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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단종된다고 소문만 무성했던 SARB 시리즈는 2018년에 완전히 단종되면서 알피니스트의 한 시절이 끝이 납니다. SARB를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건지 세이코는 2019년 알피니스트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시장 한정판을 내놓습니다. 알피니스트가 처음 도입된 해가 1959년이니 SARB017과 똑같은 시계를 청색 다이얼로 만들어서 1959개만 생산하기로 한 건데요. 이 한정판이 처음 출시됐을 때 SARB랑 똑같은 시계를 내면서 가격만 올려 받는다고 여기저기 원성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세이코는 이 시계를 금방 매진 시켜 버리면서 악플러들을 극복하고 알피니스트가 이 시대의 전설임을 입증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알피니스트 시계들은 해마다 가격이 오르고 있고, 수집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알피니스트 시리즈들이 시계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쁠 리 없는 세이코입니다. 세이코는 단종되었던 알피니스트를 새 무브먼트와 함께 다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2020년부터 모델번호가 SPB로 시작하는 알피니스트들이 지난해부터 다양한 다이얼 색상으로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SARB 알피니스트의 틀을 거의 그대로 계승해서 두 개의 용두와 내부 베젤을 장착하고 있는 39.5mm 모델과 내부 베젤이 없는 용두 하나짜리 38mm 모델,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을 만들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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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는 오늘 살펴볼 SPB210처럼 SARB의 틀을 그대로 계승한 버전이 더 마음에 듭니다. SPB 알피니스트는 파워리저브가 70시간으로 늘어난 6R35 무브먼트와 함께, 디스플레이 케이스백과 조금 더 나아진 품질의 시계줄을 장착한 것이 특징입니다.

안타깝지만 가격은 SARB 시리즈에 비해서 많이 올랐습니다. 가령 SPB210의 리테일가는 125만 원으로 책정이 되어 있습니다. 세이코 매장에 문의해 보시면 대개 100만원 전후 혹은 심지어 그 이하의 많이 할인된 가격에 판매가 되겠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0-40만 원대에도 유통되던 SARB 알피니스트의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많이 아쉬운 가격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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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선보인 SPB210은 SARB 알피니스트의 틀은 계승하되, 알피니스트 시리즈에서 제가 바라던 것들이 반영된 모델입니다. 저는 SARB017을 볼 때마다 녹색 다이얼에 금빛 인덱스라면 스틸 케이스보다는 골드나 브론즈 같은 좀 더 따뜻한 빛깔의 금속 케이스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번에 드디어 골드 케이스 버전이 나와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다소 플라스틱 느낌이 강했던 악어 무늬 가죽줄도 제대로 된 빈티지 소가죽줄로 바뀌었습니다. SARB 다이얼의 길고 복잡한 프린트도 간소화가 되어서 이번에는 세이코 스포츠의 X자 로고와 짧은 문구들만 남았습니다. 다소 높아진 가격만 빼면 이제까지 나왔던 알피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알피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 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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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mm 사이즈와 46mm의 짧은 러그 투 러그는 가는 손목에서도 적당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200미터 방수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착용감이 거추장스럽지 않아서 어디서나 함께할 수 있는 모험용 시계로서 이상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알피니스트가 장기간 누렸던 인기의 비결은 이렇게 잘 뽑아낸 사이즈에 있지 않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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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케이스 덕에 드레시한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손목이 굵은 분들이 차면 이 시계는 더 드레시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좀 정석에서 살짝 벗어나는 스포티한 느낌의 드레스시계를 보여주고 싶다면, 알피니스트는 좋은 선택일 겁니다. 물론 원래 목적대로 모험용 시계로 활용하면 더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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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가 두 개가 있는 것도 이 시계의 재밌는 점인데, 세 시 방향에 있는 용두는 스크루다운 기능이 있고, 일반적인 수동감기, 날짜조정, 시간 조정 기능을 담당하는 용두입니다. 네 시 방향의 용두는 시계 안으로 보이는 방위 베젤을 조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침을 해가 떠 있는 방향으로 놔두면 시침과 시계의 12시 인덱스의 중간 정도가 남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걸 기준으로 해서 지금 내가 있는 방향을 파악해서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등반가들을 위해 개발된 시계이니만큼 이런 기능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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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무반사 처리가 되어 있는 사파이어 크리스탈을 시계 유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세 시 방향에는 날짜 돋보기 역할을 하는 싸이클롭스가 설치되어 있고요.

그 밑으로 보이는 다이얼은 익숙한 알피니스트의 그것입니다. 녹색의 썬버스트 브러쉬 다이얼 위에 금색의 인덱스가 부착이 되어 있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시분침까지 원래 조합 그대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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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얼만 봐도 알피니스트가 왜 명작인지는 확인됩니다. 가독성도 뛰어나고, 또 클래식함과 스포티함을 다 갖추고 있어서 매력적입니다. 무엇보다 멀리서봐도 알피니스트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이 시계만의 분위기와 색깔이 있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야광은 비유적으로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나 세이코 시계가 가장 빛나는 지점입니다. 이번에도 루미브라이트 도료를 듬뿍 활용해서 좋은 밝기와 지속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중 산길에서도 꽤 오랜 시간 의존할 수 있을 것 같은 야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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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백은 디스플레이창을 통해 무브먼트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전에는 여기에 알피니스트 로고와 모델명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제 알피니스트라는 이름은 시계 본체에서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엔진은 6R35 오토매틱 무브먼트입니다. SARB 시리즈에 들어가던 6R15에 비해서 파워리저브가 70시간으로 늘어난 게 가장 특별한 개선점입니다. 시간당 21,600회고 초당 진동수는 6회 정도입니다. 디스플레이 케이스백은 보너스인 거 같지만, 좀 장식이 들어가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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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B 시리즈에 비해 가장 많이 개선된 건 가죽줄입니다. 플라스틱 같은 합성 가죽이 아니라 이번엔 제대로 부드러운 느낌의 소가죽 빈티지 줄을 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갈색 가죽이 자칫 너무 번쩍이는 쪽으로 갈뻔한 시계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고요. 촉감이 정말 부드럽습니다.

정리하자면, SPB210은 알피니스트 시리즈가 갖고 있었던 매력을 잘 계승하면서, 소소한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더 완벽을 기한 시계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계에서 바꾸고 싶은 건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요. 스틸 케이스에 색깔만 입힌 PVD 케이스가 아니라 과감하게 브론즈 소재 같은 걸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험용 시계와 브론즈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이 없을 텐데, 아쉽지만 세이코는 케이스 소재의 사용에 있어서는 아직은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장점

  • SARB 알피니스트를 잘 계승하고 있다.
  • 70시간 파워리저브와 좋은 품질의 시계줄을 갖췄다.

특별한 단점

  • 가격이 훌쩍 올랐다.

한 가지 바꾼다면

  • PVD 처리된 스틸이 아닌 브론즈 케이스로 알피니스트를 만들었다면?

주요 스펙

  • 케이스 지름: 39.5mm
  • 러그투러그: 46.2mm
  • 두께: 12.9mm
  • 러그 폭: 20mm
  • 무게(스트랩 포함): 85.7g
  • 방수 성능: 200m
  • 케이스 소재: 금색의 PVD 처리된 316L 스테인리스 스틸
  • 시계 유리: 내부에 무반사 처리가 된 사파이어 크리스탈
  • 야광: 루미브라이트
  • 무브먼트: 세이코 6R35
  • 스트랩: 송아지 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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