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book] 한 우물만 판 사람들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2021. 03. 14

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게 된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퍼블리를 위해 남이 쓴 글을 읽고, 주말엔 디에디트를 위해 내가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이번 달에 고른 다섯 권은 한 분야에 진득하게 매진해온 이들의 이야기다. 투자, 괴물, 편의점, 음식 모형, 그리고 책까지,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안에 쌓인 것들을 아낌없이 나눠주니 독자로선 그저 고맙다.


[1]
<디 앤서>

“왜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바다에 뛰어드는가?”

1400_3book1

LG트윈스가 우승을 차지한 1994년에 처음 야구를 봤고 자연스럽게 이 팀을 응원하게 됐다. 하지만 야구팬은 아니다. LG트윈스가 이기는 날에만 야구를 좋아하고, 지는 날에는 KBO가 망하길 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경기 결과에 따라 컨디션이 왔다 갔다 한다. 그깟 공놀이 뭐라고.

최근 LG 야구만큼 골치 아픈 일에 발을 담가버렸다. 생애 처음으로 주식을 산 것. 코스피 3000 돌파 소식은 예금/적금밖에 모르던 나까지 개미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소액이지만 막상 주식을 사고 나니 겁이 났다. 난 LG트윈스가 연일 상한가를 치던 ‘고점’에 팬이 된 후로 15년째 손실 복구를 못 하고 있는데, 주식시장에서도 비슷한 꼴 나는 거 아닐까. 불안 해소용으로 주식투자 분야 베스트셀러 <디 앤서>를 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책에는 무서운 말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 비관주의자(곧 떨어질 거야)가 낙관(계속 오를 거야)으로 돌아설 때가 비이성적인 시장이 제자리를 찾아오는 변곡점이다.” 내가 바로 그 마지막 비관주의자요…. 주식투자 1주 차, 보유한 주식이 빨간색이냐 파란색이냐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내 모습에서 LG트윈스를 응원해온 지난 15년이 겹쳐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 팀에 팬심을 몰빵해야 하는 야구와 달리 주식은 분산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LG 30%, 두산 30%, NC 40%의 팬이었다면 멘탈 관리도 한결 쉬웠겠지. 책에서도 ‘기업 분석 능력’만큼이나 ‘멘탈’이 강조된다. ‘멘탈 관리법’이 필요한 건 주식 초보만이 아닐 것이다. 불합격 문자를 받고도 다른 면접을 준비해야 하는 취준생이나, 힘든 일이 있어도 티 안 내고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나, 연패에도 팀을 버릴 수 없는 야구팬이나, 우린 늘 흔들리니까.

  • <디 앤서> 뉴욕주민 | 푸른숲 | 16,000원

[2]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인간 아닌 것들의 이야기, 조선 역사의 빈틈을 채우다.”

1400_3book2

<대학내일> 잡지 에디터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새 학기 개편을 맞아 ‘온 더 로드’라는 코너를 맡았는데, 카메라 하나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인터뷰하는 무지막지한 컨셉이었다.

한 번은 길에 좌판을 깔고 엄마가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팔던 초등학생 두 명에게 말을 건넸다. 둘 중 한 명이 노트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뭘 그리냐고 물었더니 ‘괴물’이란다. 옆에 있던 친구 말로는 맨날 괴물만 그린단다. 그릴 게 많을 텐데 왜 하필 괴물일까 싶어서 이유를 물었다. “괴물은 정해진 모양 없이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잖아요.” 음, 그래. 괴물이란 건 원래 그런 거지. 기껏해야 봉준호 감독 영화 속 괴물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했던 나는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소년에게 괴물이 ‘상상의 결과’라면,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을 쓴 곽재식 작가에게 괴물은 ‘상상의 시작’이다. <한국 괴물 백과>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항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재를 찾는 작가로서, 2007년부터 한국 괴물에 대한 기록을 수집해왔다. 괴물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최적의 소재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사료 정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덧댄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이기에 가능한 접근이다. 나 또한 ‘2장-궁전을 뒤흔든 괴물들’을 읽고 드라마 <킹덤>의 다음 시즌 전개를 그려봤다.

이 책에 수록된 19점의 괴물 그림과 ‘조선괴물지도’ 또한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포인트다. 지금은 고등학생쯤 되었을 그때 그 괴물 그림 작가는 이 책 속 그림을 보고 반가우려나. 아님 ‘내가 그렸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하려나.

  •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곽재식 | 위즈덤하우스 | 17,000원

[3]
<오늘도 편의점을 털었습니다>

“내 하루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러 온 나의 구원자, 편의점.”

1400_3book3

CU는 왜 CU지? 왜 GS24가 아니라 GS25지? 세븐일레븐의 7과 11은 무슨 뜻이지? CU의 의미는 ‘당신을 위한 편의점(Convenient store for U)’이고, GS25에는 ‘24시간이 모자라, 1시간 더 서비스하겠다’라는 서비스 정신이 담겨 있다. 이 정도로 고객을 생각하니 원래 오전 7시에서 밤 11시까지 운영하던 세븐일레븐도 24시간 운영으로 방침을 바꿨겠지. 이 정도가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라면, 검색으로 찾기 힘든 경험과 노하우를 눌러 담은 책도 있다. 이 책의 저자로 말할 것 같으면…

1991년에 인생 처음으로 미니스톱에 방문한 후, 30년째 편의점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다년간 편의점 알바로 일하며 진상 손님 대처, 한여름 밤의 공포 체험, 즉석식품 제조 등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편의점 음식 품평기를 주로 올리는 블로그도 운영 중인데, 참고로 지금까지 먹은 삼각김밥만 900여 개에 달한다고. MBC <능력자들>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미국 텍사스주의 세븐일레븐 본사로 짧은 유학(?)까지 다녀온 그가 펴낸 세 번째 책이 바로 <오늘도 편의점을 털었습니다>다.

‘한 우물만 파면 성공할 수 있다!’ 한때 교육계에 떠돌았으나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엄친아’들의 난립으로 폐기된 듯했던 이 낡은 말도 저자 앞에서는 다시 설득력이 생긴다. 물론 한 우물만 판다고 다 저자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단한 건 삼각김밥을 900개 먹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꼼꼼히 기록해온 성실함이다. 한 우물이든 열 우물이든 저자처럼 성실하게 파면, 뭐가 돼도 된다.

  • <오늘도 편의점을 털었습니다> 채다인 | 지콜론북 | 14,500원

[4]
<이세린 가이드>

“한국음식은 나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음식으로 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

1400_3book4

책 제목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따온 듯하고, 캘리포니아 롤, 와플과 번데기, 비빔밥, 배추김치 등이 목차 제목인 것으로 보아 음식만화의 냄새가 난다. ‘이번엔 ‘혼자를 먹이는 법’인가?’ 전작 <혼자를 기르는 법>을 좋아했던 팬으로서 반가운 마음에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며칠 뒤 배송받아 읽기 시작한 책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주인공 이세린은 셰프도 아니고, 맛집 탐방객도 아니고. 음식 모형 제작자다. 몇 쪽 읽기도 전에 초장부터 허를 찌르는 작가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읽다 말고 인터넷에 작가 이름을 다시 검색해봤다.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질 만큼 음식 모형 제작 과정이 디테일하다. 이젠 푸드코트에서 음식 모형을 볼 때마다 이세린 대표의 작업실에 쌓인 모형 틀을 떠올리며 단가를 따져볼 것 같다. ‘저건 만드는 데 시간 좀 걸렸겠는데…’

‘음식 모형 제작자’ 설정의 탁월함은 맛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덕분에 만화는 각종 꿀팁과 리액션을 과감히 스킵하고 한국음식과 관련된 농담과 잡생각, 학창 시절과 가족 이야기에 집중한다. 농담은 선을 넘기 쉽고, 잡생각은 지저분해지기 쉬운데 김정연 작가의 농담과 잡생각은 이번에도 깔끔하다. 학창시절과 가족 이야기를 보면서는 새삼 깨닫게 된다. 개인의 성장 드라마에 음식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는 걸. 그리고 그 임팩트는 생각보다 작지 않다는 걸.

  • <이세린 가이드> 김정연 | 코난북스 | 15,000원

[5]
<소년을 읽다>

“한 사람을 환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곳, 지금 거기에 있을 소년에게 미안하다.”

1400_3book5

모르는 건 약이고, 아는 것은 힘이다. 나는 아는 힘이 두렵다. 나를 지켜주는 이 힘은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아는 게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 안에 갇히기 쉽다. 책을 읽는 것도 비슷하다. 내가 아는 것에 갇히지 않으려고 책을 읽지만, 방심하면 그 책 안에 갇혀버린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으려면 공부방 벽에 ‘손톱 물어뜯지 않기’라 써붙여놓고 수시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듯이, 결국 나의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사람 쉽게 안 변해.’ 힘이 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실망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말을 되새긴다. 그러고는 스스로 그 안에 갇힌다. ‘사람 쉽게 안 변해’라는 잔인하고 게으른 말이,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주저앉혔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고 좋은 삶을 욕망할 줄 아는’ 사람들까지도 그 말 안에 가둬버렸다.

<소년을 읽다>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저자가 1년 동안 주 1회 2시간씩 소년원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은 기록이다. 책이 좋은 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년원에서 독서모임에 참여한 소년들도 그랬고, 이 책을 읽는 나도 그랬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 <소년을 읽다> 서현숙 | 사계절 | 13,000원

kimyungkyun

About Author
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