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술은 원래 향기로 마시는 거야

안녕. 돌아온 집술 전선생,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나는 장기 집중력이 약하고 뭐든 흥미를 쉽게 잃어버리는 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미가...
안녕. 돌아온 집술 전선생,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나는 장기 집중력이 약하고 뭐든 흥미를…

2020. 02. 18

안녕. 돌아온 집술 전선생,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나는 장기 집중력이 약하고 뭐든 흥미를 쉽게 잃어버리는 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흥미가 쉽게 이동해버리는 편이다.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물건에서 저 물건으로. 술도 마찬가지다. 몇 시즌 줄기차게 사케를 좋아하다가도, “한국 사람이면 역시 쏘주지!” 했다가, 하이볼에 꽂혀 이 위스키 저 위스키 사 모으는 식이다. 최근에는 근 일 년간 와인만 쭉 마셔서 이제 정착(?)하는 건가 싶었는데 금세 새로운 술에 꽂혔다. 바로 ‘한국 증류주’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어느 술집이나 고깃집에 가도 볼 수 있는 초록’병 쏘주’는 정확히 말하자면 희석식 소주다. 알콜 원액에 물과 감미료 등을 넣어서 희석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증류주는 밑술을 증류해서 술을 만드는 전통 방식을 따른다. 재료가 되는 술을 끓여서 더 맑은 술을, 더 적은 양으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같은 알콜에 어떤 감미료를 넣느냐 정도만 차이가 나는 희석식 소주와 달리, 증류식 소주는 밑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증류 방식을 썼는지 등등 디테일한 면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난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술 중에는 화요와 일품 진로가 대표적인 한국식 증류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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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전통주’라는 이름으로 몇몇 증류주를 마셔본 적이 있다. 보리, 조, 수수 등 다양한 곡물로 만든 것도 있었고, 배, 생강 등을 가미해서 독특한 풍미가 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한식 주점에서야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술이라는 이미지를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홍대의 윤서울이라는 한식 주점에서 서울의 밤을 만나고, 그 고정 관념이 파사삭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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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은 황매실을 증류하여 만든 증류주이다. 그 덕분에 술을 마시기 전부터 매실의 은은한 달콤한 향이 감돈다. 하지만 매실주처럼 진득한 단맛이 나지는 않는다. 왜냐고? 증류시켰으니까! 입안에 흘러들어오는 순간 달콤한 뉘앙스가 맴돌다 사라지고 청아한 술맛이 남는다. 25도라는 도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외국 술로 치자면 마치 쉐리 와인 같은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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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그 향긋함에 몇 번이나 감탄하면서 마시다가 병의 뒷면을 들여다봤더니 노간주나무라는 처음보는 재료(?)가 들어있었다. 노간주나무가 뭐지? 인터넷에 검색하자 ‘주니퍼 베리’라는 답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주니퍼 베리는 외국에서 진(jin)을 만들 때 쓰는 열매다. 진에서 나는 특유의 허브향을 좋아하는데, 그 향기의 많은 부분을 사실은 주니퍼 베리가 차지하고 있다. 향이 좋아 향수를 조향할 때도 귀하게 쓰이는 고가의 재료이기도 하다.

매실주처럼 진득한 매실 뉘앙스가 아니라, 부드럽고 향긋한 매실과 맑은 술의 느낌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 너무 좋았다. 과실주 특유의 숙취 두통도 없고, 둥글둥글한 병도 귀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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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다 좋아 보이는 나는 서울의 밤을 파는 마트를 찾으러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 또, 사람들에게 사방팔방 추천하고 다닐 술을 만났다. 그게 바로 로아다. (40도짜리도 있다고 하는데 내가 마셔본 건 19도뿐이다.) 로아는 ‘흰 빛깔의 이슬’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음, 맛으로 치자면 뭐랄까, 아카시아꽃에 맺힌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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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하겠지만 진짜다. 기본적으로 로아는 쌀로 만든 증류주인데 독특한 부분이 하나 있다. ‘가향주’, 그러니까 향을 가미해서 만든 술이라는 점이다. 로아에는 아카시아 향이 첨가되어 있다. 덕분에 술잔을 입가에 가져대면 바람결에 실려 온 듯한 아카시아 향이 솔솔 난다. 그렇다면 술맛은 달콤할까?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서울의 밤보다 살짝 더 강하게 알콜의 맛이 느껴진다. 정확히 증류식 소주의 맛이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여운에서 다시 아카시아 향이 연하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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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는 내내, 그 향기가 나를 맴돈다. 진짜 재료를 우려내거나 담그거나 하는 식으로 향을 입히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아카시아 향이 순수한 술의 맛을 해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취향이니까. 하지만 나는 맑은 증류식 소주에 아카시아 향을 매칭한 그 아이디어가 좋았고, 술을 마시면서 꽃향기까지 즐길 수 있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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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술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 요즘이다. 한국의 증류주 시장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더 성장하고 다채로워지고 있다. 우리 같은(?) 애주가에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 아닌가.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술을 마셔보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즐거운 고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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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