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시칠리아와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안녕, 서울에서 에디터B다. 한 달 살기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시칠리아가 낭만의 도시라면 서울은 불안의 도시니까. 불안이라는 장작을 태워 밝게...
안녕, 서울에서 에디터B다. 한 달 살기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시칠리아가 낭만의…

2019. 12. 24

안녕, 서울에서 에디터B다. 한 달 살기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시칠리아가 낭만의 도시라면 서울은 불안의 도시니까. 불안이라는 장작을 태워 밝게 빛나는 도시. 고단한 일주일을 보상받기 위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살을 빼기 위해 런닝머신에 오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혼자만의 굴로 들어가 버린다. 모두의 마음속엔 불안이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시칠리아 한 달 살기의 좋은 점이요? 음…조바심이 안 들었어요. 그게 제일 좋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조바심을 느낄 수도 없었던 거죠.”

1400_B2

시칠리아의 삶은 정말 그랬다. 와이파이 속도가 처절할 정도로 느리고 도시에 나가기엔 교통편도 좋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이유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시칠리아가 아니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그곳이 어디든.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어디든.

1400_B2-10

하지만 서울에 오자 시칠리아에서 받은 에너지와 감정은 끊어졌다. 블루투스 해제하듯 아주 손쉽게.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돈을 더 벌거나 더 큰 명예를 가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거다. 지금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불안한 걸 보면 말이다.

1400_B2-27

서바이벌 오디션 시즌1 출연자가 2에 다시 출연한 느낌이 이럴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생활이 싫어서 서울을 떠났다. 여유 없고 각박한 삶, 스트레스를 견디는 일상, 도시의 빼곡한 인간들이 주는 답답함, 숨 막히는 바쁜 발걸음. 난 모든 것을 견디며 살고 있지만 타지로 떠난 친구들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시칠리아에 다녀오니 한적한 삶을 알 것 같기도 하니까.

1400_B2-12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불안을 안고 살지만 이 기분이 싫지는 않다. 이런 내가 도시에 맞게 진화한 인간인지 퇴화한 인간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칠리아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계속 불안을 안고 있다고 했지만 그게 스트레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난 이제 조바심에 익숙해져서 큰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모두가 일과 삶의 균형을 노래하지만, 나는 그런 스타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시칠리아를 다녀온 직후에는 조금 공허했다.

1400_B2-18

로마에서 환승하는 순간부터 이유 없이 답답했다. 한국어가 많이 들렸기 때문에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7인분의 말만 들으면 됐는데 공항엔 한국인이 어찌나 많은지. 서울을 좋아하지만 서울과 가까워진다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한 달 만에 밟은 서울 땅은 달라진 게 없었다. 조금 추워졌다는 것만 빼면. 일주일 정도는 시차 적응을 하느라 몽롱한 상태였다. 그땐 몸도 마음도 시차 적응 중이었다. 집에 있는 게 어색했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는데 출근을 하니 자연스레 시칠리아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1400_DSCF0218

그 이후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면 정말 달라진 게 없었다. 10시 반 출근, 1시 점심, 7시 반 퇴근. 모두가 일을 하고, 일에 쫓기고, 일을 쫓았다. 달라진 거라면 조금 추워진 날씨와 조용해진 사무실 분위기 정도.

지금도 한 달 살기 이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시칠리아 다녀온 거 어땠어?”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굉장히 공들여서 대답했었다.

“시칠리아? 너무 좋았지. 처음에는 한 달 살기 같은 거에 관심이 없었어. 어쨌든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니까.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는 한 달은 처음이었어. 멤버들이 좋아서였던 것 같아. 시칠리아 아니라도 재미있었겠지.”

1400_B2-31

지금은 조금 다른 대답을 한다.

“아, 그 질문은 내가 서른 번쯤 받아서 이제 말하면서도 흥미가 없는데, 너한테는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일단 열심히 말해볼게. 내 인생 가장 재미있는 한 달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금방 잊더라. 생각보다 아주 쉽게. 그게 아쉽지.”

1400_B2-29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시칠리아 여행에 관심이 있거나 한 달 살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추천합니다 꼭 가세요 아니면 꼭 갈 필요는 없어요? 솔직히 모르겠다.

‘남녀 8명이 이탈리아 남부의 섬으로 떠나서 한 달 동안 살았대요. 그 경험 덕분에 그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목표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대요.’ 같은 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엔딩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우리네 삶은 디즈니보다는 차라리 봉준호의 영화 속 세계와 더 가깝지 않을까. 바꿔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달라질 거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거라면.

1400_B2-34

이쯤 되니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든다. “당신들 유튜브에서 그렇게 신나 보였잖아? 그런데 봉준호라구요?”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말을 덧붙이려고 한다. 디에디트 객원필자 전아론 작가가 내게 해준 말이다.

“여행이 길수록 그 안에서의 낭만은 나중에야 빛나더라고요. 환할 때는 안 보이다가 불을 꺼야 반짝거리는 야광별 스티커처럼요.”

어쩌면 지금은 내가 빛나고 있어서 시칠리아의 기억이 흐릿해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언젠가 내가 칠흑 같은 암흑에 들어갔을 때 그 추억이 야광별처럼 반짝거리며 밝혀주지 않을까. 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1400_B2-14

일단은 달려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좌절하는 봉준호 영화든, 반드시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든. 어쨌든 중반까지는 멈추지 않고 달려가니까, 그 엔딩이 무엇이든 함께 달려갈 사람이 있다면.

1400_B2-38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