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노부부 도쿄 투어

금요일 밤 8시였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탑승객은 두 명. 하나는 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에디터M이었다....
금요일 밤 8시였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2019. 04. 03

금요일 밤 8시였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 8시에 출발하는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탑승객은 두 명. 하나는 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에디터M이었다.

카메라 리뷰를 위한 브이로그 영상이 필요했다. 주말에 가로수길에 가서 영상을 찍느니, 익선동을 가느니 입씨름을 하다 에디터M이 툭 내뱉었다. 아씨, 그냥 도쿄 1 2일 다녀오지 뭐.” 나는 눈을 반짝 빛내고 잽싸게 항공권 검색에 들어갔다. 결제를 마쳤을 땐 비행기 시간까지 12시간도 남지 않은 때였다. 인생 최고의 충동구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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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여행을 철저히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타입이다. 하루 전에 불쑥 비행기를 예약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도쿄는 익숙한 도시였지만, 토요일 아침에 떠나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터프한 스케줄 안에 어딜 가야할지 막막했다. 반면 태어나 도쿄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에디터M은 무척 태평해보였다. 아 뭐야, 우리 진짜 가는 거야?”하고 낄낄 웃더라. 네가 다 알아서 하겠지라는 뜻으로 보였다.

둘 다 밤을 새다시피하고 창백한 얼굴로 공항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온라인 면세 쇼핑도 했다. 공갈빵처럼 가벼운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온 에디터M이 나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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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티켓을 사면 엄청 비싸다_오늘의_리빙_포인트]

비행기에 타고나니 제법 여행 기분이 났다. 그래, 오늘은 에디터M이 아니라 혜민이라고 하자. 혜민이랑 내가 전직장부터 붙어 다닌 역사가 벌써 6년이건만, 둘이 떠나온 해외 여행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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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의 케이오 플라자 도쿄 호텔에 도착해 짐부터 내던지고 첫 끼니를 먹으러 갔다. 역사적인 첫 식사는 라멘으로 정했다. 닭육수를 진하게 우려낸 토리파이탄 라멘이 그렇게 맛있다는 얘길 듣고 두근두근. 처음 걸어보는 신주쿠 뒷골목은 제법 도쿄스럽다. 에디터M이 신나게 사진을 찍어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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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라멘집 앞에 도착했을 점심시간을 넘긴 타이밍이었지만 사람이 많았다. 마스크를 낀 일본인들 틈에서 15분쯤 기다려야 했다. 배고픔을 견디고 주문 자판기 앞에 섰는데 도통 무슨 메뉴인지 모르겠다. 을 다섯 번쯤 외치고 나서야 토리파이탄 라멘이솔드아웃데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고민할 틈이 없었다. 에디터M은 맑은 국물의 시오라멘을 주문했고, 나는 꾸덕한 국물에 말아먹는 츠케멘을 주문했다. 오오모리(곱빼기)를 주문할까 고민했지만 입 짧은 우리에겐 무리였다. 생달걀을 띄운 작은 공깃밥을 추가하는 걸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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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 맛이 나는 시오라멘]

라멘은 꿀맛이었다. 시오라멘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진했고, 츠케멘은 쫀득한 면발이 입에 착착 감겼다. 가느다란 면발을 좋아하는 혜민인 시오라멘이 더 맛있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낮술은 축복이니까 맥주 한 잔도 잊지 않았다. 테이블 한 쪽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브이로그를 찍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카메라를 향해으음, 맛있어요!”를 연발하며 면발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호로록 삼켰다.

이제 본격적인 브이로그 촬영에 나설 때였다. 가장 도쿄답고 상징적인 풍경을 영상에 담고 싶었다. 서울이라면 광화문, 도쿄라면 시부야다. 평소의 도쿄 여행이라면 굳이 시부야를 찾아가지는 않지만, 오늘은 촬영을 위해 하치코상이 있는 ‘스크램블 교차로’를 찾아갔다. 마음이 바빠 겁도 없이 택시를 탔다. 신주쿠에서 시부야는 먼 거리는 아니지만, 도쿄의 살인적인 택시요금은 야속하고 빠르게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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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로 붐비는 시부야역에 도착하니 에디터M, 여긴 진짜 도쿄네하고 한눈에 알아먹는다. 그림이 나올 것 같다. 이 건널목을 서 너 번 반복해서 건너면서 영상을 찍어보기로 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급히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훨씬 풍경이 시원하고 근사하다. 이래서 시부야역 스타벅스가 늘 만석이구나. 창가 쪽 테이블에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타임랩스 촬영에 들어간다. 사람들의 까만, 노란, 빨간 우산이 건널목에 펼쳐지고 우산들이 빠르게 길을 건넌다. 뜻밖의 진풍경이다. 촬영이 끝날 때쯤엔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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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아, 이제 오모테산도로 가자.” 서울에도 흔해 빠진 스타벅스 커피를 쪽쪽 빨며 내가 말했다. “? 시부야는 이게 끝이야? 나 건널목만 보고 가는 거야?” 이쯤되면 여행이란 말은 취소해야 했다. 촬영으로 떠난 1 2일 일정에서 그 도시의 매력을 탐닉한다는 건 사치다. 난생 처음 온 도쿄에서 시부야는 건널목, 오모테산도는 육교만 건너는 것이 오늘 에디터M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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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테산도까지 걸어가는 길엔 구글 지도가 말썽이라 길을 좀 헤맸다. 그 바람에 오히려 재미있었다. 근사한 세제와 주방용품 따위를 파는 편집샵을 즐겁게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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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곳곳에서 아키라를 만날 수 있다]

거리엔 만화아키라의 삽화가 가득했다. 혜민이는 저게 뭐냐며 힙한 그림이라고 사진을 찍었다. 80년대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해주니 놀란다. 본인들이 가진 문화를 잘 사용할 줄 아는 도시다. 근미래를 다룬 아키라의 배경은 2019년의 네오 도쿄.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재밌는 건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2020년에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데, 실제로 30년이 흐르고 2020 도쿄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도쿄는 도시 곳곳 공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마다 아키라의 삽화를 커다랗게 그려넣고 있다. 예언자와도 같은 이 사이버펑크 애니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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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스트리트에 도착하고 나니 마음 놓고 구경할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여긴 한국으로 치면 가로수길 옆 세로수길 같은 곳이라고 설명해준다. 캣스트리트 뒷골목의 예쁜 카페에 찾아갔다. 사실 내가 가고 싶었던 건 옆 가겐데, 에디터M이 대뜸여기가 촬영하기 좋겠다!”라며 도넛 가게로 직행했다. 어젯밤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어찌나 목이 타던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들이켰다. 영상 찍으면 예쁘게 나오겠다 싶어서 라즈베리 글레이즈드 도넛도 주문했다. 새빨간 도넛은 보기에만 예쁜 게 아니라 새콤하니 맛있었다. “혜민아, 힘들지? 느긋하게 쉬어. 3분 정도.” 해가 빨리 지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촬영을 해두려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3분 만에 먹으라는 말에 에디터M이 울듯이 웃는다. 노부부끼리 와서 다행이라고. 이 거칠고 여유 없는 일정을 대체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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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을 정신도 없어서 작년에 찍은 오모테산도 사진을 첨부한다]

정신없이 커피 두 잔과 도넛을 흡수하고 오모테산도 거리를 한 바퀴 스캔했다. 육교에 올라 카메라를 들고 빙글빙글 도는 샷을 촬영했다.여러분 우리는 지금 오모테산도! 까얏호!” 카메라가 돌아가면 없던 흥도 끌어 오른다. 우리는 이미 프로페셔널. 브이로그의 프로였다. 7시도 전에 한밤중처럼 어두워졌다. 이젠 서두를 것도 없었다. 에디터M이 가보고 싶다고 했던 빈티지 샵을 가보기로 했다. 내가 얼마 전 셀린 빈티지백을 득템한 멋진 곳이다. 혹시, 도쿄 빈티지샵 정보가 궁금하시다면여기를 클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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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진찍을 정신이 없어서 작년에 찍은 사진]

아아, 사랑의 아모르 빈티지. 세 달 만의 방문이지만 여전히 멋진 물건이 많았다. 쇼핑을 빠르게 하는데 소질이 있는 혜민이는 가게를 한 바퀴 돌더니 두 개의 가방 후보를 뽑았다. 까르티에 빈티지 백과 루이비통 에피 라인의 빈티지 백이었다. 오래 망설일 것도 없이 반질반질한 가죽에 C로고의 장식이 붙어 있는 까르티에 백이 더 예뻤다. 에디터M에게 잘 어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Processed with VSCO with fr4 preset[에디터M이 80만원 대에 구입한 빈티지 까르띠에 백] 

나는 전에 혼자 와서 1시간을 고민하다 구입했는데, 혜민이는 10분 만에 가방을 골랐다.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오늘 도쿄에서 무엇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지만, 근사한 까르티에 백을 구입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내가 얼마 전에 구입한 셀린 백과 비슷한 디자인이었지만 훨씬 컨디션도 좋고 시크했기 때문에 샘이 났다. 나도 뭔가 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고, 나는 쇼핑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타입이었다.

그마나 구입한 거라면 나의 최애 편집샵 오프닝 세레모니에서 구입한 에코백. 정말 비닐 가방처럼 얇은 재질인데, 눈이 부실 정도의 네온 핑크 색이다. 둘 다 마음에 들어해서 커플템으로 구입했다. 우린 이번 여행에서 정말 노부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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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인지 초록색인지 알 수도 없다]

이제 긴자로 이동할 시간이었지만, 오모테산도에서 쇼핑 욕구를 채우지 못한 나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이자벨 마랑 매장만 들리게 해달라고 손을 모아 사정했다. 오모테산도의 이자벨 마랑 매장은 노란 컬러의 유니크한 건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한밤중에 들리니 노란색이 시커멓게 보여서 유니크고 뭐고 느낄 수가 없다. 서너 벌의 재킷을 입어봤지만 어울리는 건 없었다. 더 시간을 끌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오모테산도 뒷골목을 빠져나왔다. 흥미로워 보이는 편집샵이나 카페가 많았다. 다음에 오면 꼭 가보자.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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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이란 것이 폭발하는 긴자의 샤넬 매장]

긴자는 밤에도 화려했다. 수많은 명품샵과 백화점, 긴자 식스 건물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첫 도쿄 여행에서 신주쿠, 시부야, 오모테산도, 긴자만 경험한 혜민이는여긴 온통 화려하네라고 말했다. 서울로 따지자면 명동과 청담동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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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 미츠코시 백화점 앞 사거리에 카메라를 두고 영상을 찍었다. 엄청 로우앵글로 촬영했는데 화려한 간판과 수많은 사람들, 자동차 덕에 멋진 영상이 나왔다. 2시간쯤 긴자 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되도록 촬영을 했던 것 같다. 춥고 배가 고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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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긴자에서 저녁 식사로 먹기로 한 건 스시 오마카세였다. 그런데 스시집 앞에 서서 둘 다 말이 없었다. 다른 거 먹을까?” 왠지 따뜻한 것이 먹고 싶었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만한 그런 음식. 엄청 고민하다 솥밥집 하나를 발견했다. 어두운 골목길에 숨겨져 있는 가게였는데 사람이 아주 많았다. 점원이 가져다 준 영어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뭐가 뭔지 알기 어려웠다. 오히려 영어로 쓰여있어서 더 어려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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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솥밥을 먹어야 하나 박 터지게 고민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부부 중 여자분이 말을 걸었다. 고모쿠 솥밥을 드세요. 그게 맛있어요. 야키도리도 다 맛있고. 이 옆집도 토리긴인데 이 집이 훨씬 맛있어요. 잘 찾아온 거예요.”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분만 한국인이었다.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에서 산 지 이미 오래됐다고. 그 분이 조근조근 추천해준 메뉴를 몇 가지 주문했다. 술도 종류가 많았다. 솥밥 집에 샴페인을 팔더라. 흥에 겨워 나는 미니 사이즈 브뤼 샴페인을 한 병 시키고, 혜민이는 우메보시맛 술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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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배가 고파서 한참 먹다 찍은 더러운 솥밥 사진]

버섯과 죽순, 게살이 듬뿍 들어간 솥밥은 그 자체로 정말 맛있었다. 옆자리 분이 남편과 오랫동안 찾아오는 가게라고 말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 아주 좁아서 그 부부의 저녁 식사에 초대된 것 같았다. 닭꼬치도 맛있고 가지 구이와 피망 구이도 맛이 좋았다. 욕심껏 시킨 탓에 쉬지 않고 접시가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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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취해서 가게를 빠져나온 우리는 카메라를 휘휘 저으며 외쳤다. 브이로그 따위 몰라!! 2차 가자!!” 예전부터 함께 오고 싶어했던 일본 최초의 바루팡이 솥밥 집 바로 옆에 있었다. 은발의 바텐더가 칵테일을 흔들어준다는 그곳. 얼마나 근사한가. 1928년에 오픈해 여태껏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술집이라니. 다자이 오사무같은 문인들이 주로 찾았다는 이야기도 마음속 로망에 불을 지핀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지하의 바에 내려갔지만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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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물색해둔 다른 바에 찾아갔다. 디하츠맨이라는 청담동 느낌의 바였다. 가츠산도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했는데 배가 불러서 주문하지 못했다. 칵테일을 한 잔 씩 비우고 나서야 조금 소화가 되는 것 같아가츠산도 데키마스까??”하고 물어봤지만 또 솔드아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서글펐다. 서글플 땐 3차를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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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진짜 별세계!!]

아무 생각없이 주욱 걸어 나오니 별세계가 펼쳐졌다. 긴자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일본식 주점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까지 온갖 술집들이 포장마차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지금도 거기가 어딘지 정확히 모르겠다. 점포 하나 하나가 핫해 보였다. 어딜 가야할지 몰라서 망설이다 에디터M이 외쳤다. ! 저기 굴을 판다! 오늘 3차는 석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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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취기가 올라오고, 코끝이 향긋하고 비릿해진다]

그래서 3차는 석화였다. 아일랜드의 굴과 미국 굴, 일본 굴을 2개씩 주문했다. 식초 소스를 뿌려서 굴을 후르륵 빨아들이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 향이 가득 퍼진다. 비리고 향긋하다. 행복하다. 어른의 맛이다. 가게 안에는 토요일 밤을 즐기는 일본인들이 가득했다. 누군가의 토요일 밤을 훔쳐보는 기분. 묘하다. 아이고, 흡연도 된단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호사에 에디터M의 뺨이 기분 좋게 솟아올랐다. 긴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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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여기서부터는 아주아주 취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영상을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찍었다면 아주 가관일 것이고, 안 찍었다면 다행이다. 우리는 또 택시를 탔다. 내가 전부터 가보고 싶은 롯폰기의 바가 있다고 혜민일 꼬드겼다. 여긴, 꼭 이태원 같은 곳이야. 엄청 재밌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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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 이태원 클럽 분위기다]

만취 상태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곳은 롯폰기에 위치한 한 바인데. 난 그곳의 이름도 몰랐고 정확한 위치도 몰랐다. 한 번 지나가다, 저긴 핫플이군!”하고 점찍어 놨던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것이다. 놀라운 취중본능. 우린 수줍게 여권 검사를 하고 그 바에 들어갔다. 또 다른 별세계였다. 클럽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DJ가 바로 눈 앞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겉 멋든 혜민이가 그레이 구스를 스트레이트로 주문해서 가져왔다. 취한 기운에도 몹시 썼다.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설프게 어깨를 흔들다 술이 조금 깨버렸다. 한국인을 마주쳐서 인사도 나눈 것 같다. 영국인이랑도 인사를 나눈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에야 이름을 알았다. 퍼블릭 식스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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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를 빠져나오니 이미 새벽이라 문을 연 곳이 많지 않았다. 2년 전에 일본식 소주를 마셨던 츠구미라는 꼬치구이 집에 들렀다. 꼬치는 한 입도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감자 사라다 하나와 하이볼을 두 잔 주문했다. 그래, 도쿄에 왔으니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산토리 하이볼 한 잔 정도는 마셔야지. 아니 근데 이게 왠 일? 생각 없이 시킨 감자 사라다가 꿀맛이다. 우리는 또 코를 박고 감자 사라다를 먹었다. 그리고 간빠이.

5차를 마치고도 호텔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더 마시자고 외친 건 나라는 진상의 아이디어다. 편의점에 들어가 크림이 들어간 롤케이크과 맥주, 컵라면, 디저트 따위를 쓸어담았다. 그리고 호텔방에 들어와서 둘 다 기절해버렸다. 6차는 깊은 수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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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보니 머리에 종이 울리고 있었다. 아아, 숙취다. 1박 2일 여행에서 숙취라니! 술은 약하지만 숙취따윈 모르는 혜민이는 먼저 일어나서 어젯밤에 사온 케익을 오물오물 먹고 있더라. 도쿄의 날씨는 역대급으로 화창했다. 우리는 패잔병처럼 엉망이 된 얼굴로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얼굴이 너무 부워서 잘 웃어지지도 않았다., 우리 꼬라지정말!” 정신을 차리고 편의점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에디터 기은의 인스타그램 라이브 알람이 떴다. 기은인 아침부터 일어나 마라톤에 참가한다고 했다. 숙취에 쩔어있는 노부부는 기은이의 가벼운 목소리와 화사한 얼굴을 보며, 정말 건강해보이는 일요일이다…”하고 현타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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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날씨]

생각 같아서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날씨가 너무 좋았다. 카메라를 들고나가 분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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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택시를 탔다. 도쿄에 오면서 혜민이에게도쿄 사람들은 티머니 교통카드처럼 스이카 카드를 써.” 하고 잘난척했지만 혜민이는 스이카를 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너무 바빠서 그 비싼 도쿄의 택시를 미친 듯이 타고 다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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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선지는 고민 끝에 다이칸야마로 정했다. 혜민이가 좋아할 법한 동네였다. 그 유명한 티사이트 츠타야 서점으로 시작해 다이칸야마 투어를 시작했다. 떠나는 날의 하늘이 너무 새파래서 야속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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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둘러보던 혜민이가 결국 폭발했다. , 짜증나. 이렇게 시간이 없다니. 여기 너무 좋은데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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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잡지가 있다니]

책을 좋아하고 잡지 문화를 사랑하는 혜민이는 츠타야의 집요하고 방대한 서적 코너를 하나 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길 대충 훑어 보고 나가야 하는 게 너무 아깝다면서. 결국 츠타야에서 생각보다 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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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커플로 구입한 핫핑크 에코백]

카페라도 들릴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비행기 타기 전의 시간이 길지 않았다. 우리는 쫓기는 사람처럼 다이칸야마를 반쯤 뛰어다녔다. 재밌는 편집샵이나 빈티지샵이 정말 많은데, 혜민이에게 보여주지 못해서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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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간이 부족하다고 종종대면서도 메종 드 리퍼 머그와 마가렛 호웰 에코백을 구입했다. 역시 나였다. 공기처럼 돈을 쓰는 소비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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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이가 이 동네는 일요일 낮의 정서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조용히 산책을 나온 말끔한 옷차림의 힙스터들이 가득하다면서. 우리는 그 힙스터 무리에 끼기엔 발걸음이 너무 조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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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끼니로 스키야끼를 점찍어 두었는데, 가려던 가게가 문을 닫았다. 공항 버스 시간까지 고작 1시간.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 혜민이는 스키야끼가 아니라 다른 걸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촬영만 한 이 여행을 보상 받기 위해선 질 좋은 소고기가 필요했다. 다행히 나의 구글맵은 지난 1년 동안 완성해둔 탄탄한 맛집 리스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급하게 근처의 다른 가게를 수소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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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오다큐 서던 타워로 달려갔다. 가게 안은 한산했다. 스키야끼는 현지인들도 아무 때나 먹는 메뉴는 아니다. 아주 비쌌다. 고기 질에 따라 가격이 다르더라. 3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제일 싼 걸 먹긴 섭하고 제일 비싼 걸 먹기엔 용기가 안나서 중간 것을 선택했다. 먹기 위해 기다리는 과정 모두가 시각적 유희에 가까웠다. 기모노를 입은 직원이 나와 계란을 터트려 섞어주고, 세심한 손짓으로 고기를 한 장 한 장 정성껏 구워줬다. 계란 노른자에 퐁당 찍어 먹은 첫 고기 맛은 기가 막혔다. 짭쪼름한 소스와 기름진 고기. 거기에 고소한 계란 노른자가 코팅되어 그야말로 천국의 맛. 지글지글 구워낸 파도 맛있고, 곤약도 맛있고, 두부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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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맛]

도쿄에서 스키야키를 먹는 건 처음이 아니었는데, 여긴 유독 계란 인심이 후했다. 계속해서 새 계란 접시를 내주어 깨끗한 상태로 먹을 수 있었다. 마지막엔 아주 살짝 익힌 계란을 얹은 작은 덮밥이 나온다. 화려한 피니시였다. 디저트로 달콤한 콩 한 알과 배맛 샤베트가 나왔다. 공항버스 시간이 다가와 초조했지만, 한 입도 남기지 않았다.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고 빛과 같은 속도로 계산을 해추웠다.

헐레벌떡 공항에 도착해 과자를 잔뜩 쇼핑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지금도 우리가 도쿄에 왔다 가는 게 믿기질 않는다.” 신기루 같은 1 2일 투어였다. 충분히 영상을 찍었을지 염려가 됐지만, 서울에 돌아와서 200GB 용량을 채웠다는 걸 확인하고 우리의 투혼이 엄청났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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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이가 이게 갖고 싶었는지 찍어뒀더라]

여행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출장이라고 하기에도 묘한 독특한 1 2일이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묘하고 동료라고만 말하기에도 섭한 그녀와 다녀오기도 했고. 이번에도 느꼈지만 우린 정말 노부부 같았다. 서로에게 짜증을 내기 바쁘지만 서로가 아플까 싶어 챙기기도 바쁘다. 나는 홍삼을 강제로 먹이고, 혜민인 내가 기침을 하니 계속 차를 끓여줬다. 아무래도 싫은척 하지만 날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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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도 함께 도쿄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정말 혜민이가 좋아할 만한 아기자기한 골목을 여유있게 걷고 싶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은데. 지저분한 듯 보이는 빈티지 샵이나 할아버지가 드립 커피를 내려주는 오래된 카페 같은 곳들. 언젠가 또 갈 일이 있겠지. 그래서 기록해둔다. 형편없이 바쁘고, 즐거웠던 노부부의 첫 도쿄 여행.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