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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의 티타임

안녕,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 며칠 전에 올라온 김작가님의 ‘을지로의 밤과 낮’을 읽고 혹해서 간만에 을지로 다방을 다녀온 라이프스타일 덕후 신동윤이다....
안녕,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 며칠 전에 올라온 김작가님의 ‘을지로의 밤과 낮’을 읽고…

2019. 02. 19

안녕, 디에디트 독자 여러분. 며칠 전에 올라온 김작가님의 ‘을지로의 밤과 낮’을 읽고 혹해서 간만에 을지로 다방을 다녀온 라이프스타일 덕후 신동윤이다.

Processed with VSCO with av4 preset[을지다방의 시그니처 쌍화차 사진은 에디터M 제공]

이번에 소개해주신 을지다방은 쌍화차를 시그니처로 삼지만, 다방하면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래, ‘커피 2스푼, 프림 2스푼, 설탕 2스푼에 인삼가루 살짝’이라는 황금 레시피를 자랑하는 전설의 다방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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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은 차 다자(茶)에 방 방자(房)를 쓴다. 카페가 커피 전문점이라면, 다방은 본디 차 전문점으로써의 입지를 가져야 하는 장소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다방을 차 전문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차라리 다방 커피라는 시그니처 메뉴를 가진 커피 전문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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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과거에도 그랬다. 학생들은 만나서 토론을 하고, 연인들은 약속을 잡는, 낭만과 사람이 넘치는 시기의 다방도 커피를 주력으로 팔았다. 심지어 기록을 뒤져보면 50년대에도 커피가 주력이었다고 하니 꽤 전통있는 셈이다. 다방이 ‘차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소’로 존재하던 모습을 보려면, 조선 시대 궁궐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에 ‘차’가 들어가는 장소를 커피전문점으로 만들었으니, 별다방따위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는 커피의 민족이었다(혹시 몰라 검색해봤더니,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아시아 최대다. 진짜 커피의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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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다방 이야기를 왜 하는가. 그게, 내가 커피를 안 마셔서 그렇다. 못 마시는 건 아니지만 뭐가 맛있는지 전혀 모르겠고, 카페인이 필요해서 마신다면 에너지드링크의 효율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커피 전문점은 있는데, 차 전문점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 영 만족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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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민족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모두가 커피를 사랑하니 대체재 취급을 받는 차는 찬밥 신세일 수밖에 없다. 커피/차 전문점이라고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도 원두 종류는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면서, 차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물론 얼그레이, 다즐링, 브렉퍼스트 정도의 선택지는 있지만, 종류만 덜렁 있을 뿐 브랜드를 고를 수는 없다. 게다가 홀리프가 아니라, 거진 다 티백을 사용한다. 커피 전문점에서 카누 아메리카노를 파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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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차 애호가에게는 척박한 땅이다.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자급자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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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차를 자급자족하기로 한 여러분께 갈채를 보낸다. 짝짝짝. 차-급자족이라. 어려울 것도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필요한 건 딱 두 가지. 찻잎과 그걸 거를 도구다. 티백이라면 딱히 거를 필요도 없지만, 제대로 맛을 즐기려면 홀리프(자르지 않은 찻잎, 전엽이라고도 한다)를 써야하니 찻잎을 쓰자.

render-1550548369689-0[다이소 스테인리스 인퓨저 4,900원]

차를 우리기 위해 가장 편리한 방법은 티 인퓨저다. 우린 다음 건지기만 하면 된다. 전문 브랜드에서 나온 멋들어지고 화려한 빅토리아풍 인퓨저도 2만 원이면 사고, 사실 다이소에서도 3-4천 원이면 살 수 있다. 정 사기 돈 아깝다 싶으면 집에 있는 조리용 체를 사용해도 된다. 어쨌건 우리의 목적은 찻잎을 거르는 거니까. 결국 중요한 건 찻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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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 해도 유명 브랜드의 찻잎을 구하려면 이태원 수입상에 가야 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발전하여 마음만 먹으면 트와이닝, 마리아쥬 프레르, 웨지우드 같은 브랜드의 차도 쉽게 직구할 수 있게 됐다. 오오, 기술이란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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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무슨 차를 마시냐고?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지만 일본의 차 브랜드, 루피시아다. 엥, 방금 전에는 세계적인 브랜드도 쉽게 직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해놓고 웬 일본 브랜드? 너무 일본 좋아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근데 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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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차 가게에서 파는 홍차는 블렌디드라는 종류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찻잎을 섞은 것이다. 흔히 마시는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얼그레이, 요크셔티도 모두 다 블렌디드다. 여기서 브랜드가 무슨 상관인고 하니, 블렌드라는 게 딱 레시피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닌 터라 같은 원산지의 찻잎을 사용한 같은 블렌드라도 브랜드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다.

심지어 다즐링 같은, 그 자체로 품종인 스트레이트 티도 건조 기간, 온도 같은 여러 조건 탓에 브랜드마다 맛이 다르다. 같인 커피콩인데도 에티오피아산과 케냐산이 다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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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브랜드들은 뭘 기준으로 블렌드를 할까? 흠, 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생각해보자. 물, 물의 온도, 찻잎, 찻잎을 우리는 시간. 여기서 물의 온도와 찻잎을 우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제해야 한다. 그럼 결국 남는 건 찻잎과 물뿐이다. 그래서 브랜드들은 자국의 물에 맞게 블렌드를 한다. 그래서 ‘가장 맛있는 차를 마시기 위해선 그 나라의 물을 구해와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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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물. 특히 유명한 홍차 브랜드가 많은 영국의 물은 무기질이 많이 녹아 나오는, 이른바 ‘경수’다. 유럽여행 안내 책자의 주의사항에 자주 보이는, 석회수 때문에 피부에 트러블이 나거나, 모발이 망가질 수 있다는 말들을 기억해보자. 즉, 우리나라랑 물이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물은 ‘연수’다. 그럼 여기서 여러분을 위한 작은 퀴즈. 일본의 물은 연수일까, 경수일까? 정답이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연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물에 맞춰 블렌딩 된 루피시아의 차는 다른 것들보다 한국의 물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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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는데, 홍차를 직구하면 관세가 40%가 붙는다. 농담이 아니라, 15,000원짜리 차를 직구하는데, 배송료만 20,000원이 추가로 든다. 그래서 나는 대개 일본에 가는 길에 홍차를 사오거나 일본을 방문하는 주변인에게 부탁하곤 한다. 큰 팩 하나 사 오면 2-3달은 버티니까 생각보다 번거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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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행가는 사람한테 뭘 부탁하는 건 참 못 할 짓이지만, 루피시아는 딱히 ‘그걸 사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가야’할 필요가 없다. 한국사람이 자주 가는 오사카, 후쿠오카에도 매장이 잔뜩 있고, 한국 사람을 보기 어려운 오키나와, 홋카이도에도 적지 않은 매장이 있다. 도쿄에만 해도 24개의 지점이 있는데, 위치를 보면 ‘도쿄 여행을 가면 대개 한 번쯤은 지나가는 루트’에는 거의 다 깔려있다.

게다가 일본 거주자가 아니라서 행선지가 늘 바뀌는 여행자인 우리에게 어디에나 있다는 건 참 중요하다. 나도 살 거라고 생각하고 사 오는 게 아니라 지나다니다 보면 눈에 보여서 ‘아, 다 마셨지’하고 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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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자랑이지만, 내게 루피시아를 사다주다가 차를 먹게 된 지인도 있다. 루피시아는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걸로 유명하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우선 전부 다 준비해봤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 가장 기본적인 홍차인 얼그레이만 해도 종류가 4가지는 되고, 조금씩 맛이 다르다. 내가 마시는 가장 기본에 충실한 그랜드 클래식부터(나는 무슨 맛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나는 얼그레이도 있다. 게다가 어지간한 건 시음도 가능하다. 홍차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온갖 종류의 녹차, 달콤한 향이 나는 가향차 등, 종류가 정말 다양하니 후회할 일은 많지 않으시리라. 게다가 지역마다 지역색이 담긴 차를 발매하니까 모으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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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시아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내가 차를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볼까 한다. 차가 커피의 대용품 취급이라고 말했고,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그랬지만, 나는 그냥 다른 취향의 문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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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기본적으로 각성제다. 카페인의 어원이 커피다. caffee + ine(알칼로이드계 물질 어미)다. 그럼 차는? 아, 물론 차도 카페인은 들어있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카테킨이라고 하는 폴리페놀계 물질(그렇다. 화장품에도, 건강식품에도 있는 항산화 물질이다!)이 카페인 흡수를 억제하고, 되려 테아닌이라는 성분이 심신의 안정을 이끌어낸다. 커피가 레드불이라면, 차는 슬로우 카우다. 물론 성분 따위는 몰라도 된다. 차를 즐기다 보면 그 효과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충분히 각성된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따듯한, 혹은 차가운 차 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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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애호가에게 척박한 땅인 대한민국이지만, 차 한 잔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 어떠신가, 여러분 바쁜 일과 중에 잠시 여유를 갖는 오후 2시의 티타임을 즐기시는 건.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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