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나홀로 오사카

“나 도쿄가려고” 밤 10시의 사무실. 노란 불빛 아래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에디터H가 말했다. 작년 12월은 유독 바빴다. 어떤 선언같은 에디터H의 말을...
“나 도쿄가려고” 밤 10시의 사무실. 노란 불빛 아래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에디터H가 말했다.…

2019. 01. 20

“나 도쿄가려고”

밤 10시의 사무실. 노란 불빛 아래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에디터H가 말했다. 작년 12월은 유독 바빴다. 어떤 선언같은 에디터H의 말을 듣고 마음이 초조해졌다. 난 어디로 가지? 다들 아시겠지만 디에디트는 연초에 조금 긴 휴식기를 가졌다. ‘조금만 있으면 쉴 수 있어. 그것도 꽤 길게’ 이 사실 하나로 지독한 12월을 버텼다.

bcut_462C1C5A-8BE9-4E5A-83BF-64F256957FCB[먹는 건 그렇게 찍었으면서, 글리코상은 딱 한 장 찍었더라고…]

일단 오사카다. 언제나 그렇듯 별 다른 이유는 없다. 호기롭게 4박 5일이나 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정확히 말하면 에디터H가 끊어줬다). 3박은 오사카 1박은 교토 일정이다. 이게 얼마만에 떠나는 나 홀로 여행이더라. 혼자가는 여행이라 여행지를 정하는게 쉬우면서도 어려웠다.일주일 뒤면 출국인데 비행기 스케줄 말고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즐겁지만 그게 3박 이상이 되면 외롭다. 좋은 걸 보고 먹어도 이게 얼마나 좋은지 함께 호들갑 떨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 즐거움이 딱 반토막 되기 쉽다. 일본엔 영어 혹은 한국어 메뉴까지 잘 갖춰져 있는 곳도 있었지만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진짜 오사카 토박이들이 가는 그런 곳. 낮동안의 스트레스를 먼지 털어내듯 술을 마시고 있는 그런 곳에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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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으니 바로 에어비앤비 트립이었다. 에어비앤비 트립은 호스트와 함께 어떤 경험을 공유하는 서비스다. 에어비앤비가 어떤 공간을 빌려주는 개념이라면, 트립은 호스트가 특정 나라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에 가깝다. 때마침 지인이 나홀로 LA 여행에서 에어비앤비 트립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던 참이라 망설이지 않고 검색에 돌입한다. 바로 예약 완료! 오사카에서 하나 교토에서 하나.


Part1. OSAKA

오사카는 맛있는 음식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일본이야 혼밥 문화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밤이었다. 일어라고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어디입니까? 말고는 못하는 내가 혼술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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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택한 트립은 ‘EAT, DRINK, LOVE Osaka’. 어쩐지 좀 수상해 보이는 트립이지만, 별로 이상할 건 없다. 호스트와 함께 오사카의 이자카야를 돌면서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런 트립이다. 3시간 이루어지는 이 트립의 가격은 인당 11만원 정도.

원래는 5명 정도가 참여하는 트립인데, 전날 호스트로부터 에어비앤비앱을 통해 메시지가 왔다. 원래 6명 정도가 함께 하는 트립인데 내가 예약한 날짜에 신청한 사람이 나 혼자라는 내용이었다. 혼자라니 그럼 난 호스트와 단 둘이 돌아다녀야 하는건가? 은근히 취소되길 바라며 답을 보냈는데 호스트는 혼자도 괜찮단다. 덕분에 호스트와 1대 1 오사카 속성 이자카야 투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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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오사카 시내에서 지하철로 10분 정도 떨어진 역에서 오늘의 호스트인 타파와 만났다.이곳은 확실히 주거지역의 느낌이 강하다. 많은 일본인들이 잰 걸음으로 퇴근하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서로를 알아봤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외국인은 호스트와 나 단둘이었으니까.

“오늘은 너밖에 없으니까 마음껏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오사카는 처음이야? 그동안 어떤 걸 먹었어? 타파는 정말 나에게 다 맞춰줄 생각인것 같았다. 이 지역에 수십 개의 이자카야를 알고 있으니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무었이든 먹을 수 있다고 말하더라. 별 시원찮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동안 먹은게 별로 없었으니까. 고민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해결되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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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데려간 곳부터 범상치 않았다. 큰 상가의 지하에 있는 작은 술집이었다. 타파는 종업원과 사장까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앉은 옆 테이블엔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들과 아빠가 정답게 쿠시카츠를 나눠 먹고 있었고, 바에는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이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듯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 진짜였다. 이런 곳이 바로 진짜 토박이들이 가는 곳이구나.

bcut_2A5D291C-5F6D-42E1-8A8C-96D6A720B660[지금부터 이자카야에 토마토가 있으면 무조건 시킨다]

흔한 영어 메뉴판도 없었다. 호스트는 능숙한 일본어로 주문을 했다. 첫 번째 메뉴는 토마토. 네모낳고 분홍빛이 도는 소금판 위에 슬라이스한 토마토가 나왔다. 소금기를 흡수한 토마토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다. 소금기를 머금은 마요네즈가 만나 감칠맛이 폭발한다. 솔직히 이날 늦은 점심을 먹어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덕분에 집나갔던 입맛이 귀환했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bcut_30379425-AE40-4F89-A68C-9506BFDF84FB[튀김은 언제나 옳다. 묘하게 지금도 생각나는 맛]

다음 메뉴는 무엇이든 꼬치에 꽂아 튀겨먹는 쿠시카츠가 나왔다. 돼지고기, 소고기를 튀겨 나왔다. 꼬치를 옛날 급식통처럼 보이는 스테인리스 통에 있는 검고 오래된 소스에 찍어 먹는 메뉴다. 오사카가 쿠시카츠로 유명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혼자 다니니 먹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잘 되었다. 이 소스는 낙장 불입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어야하는 거니 한 번 찍으면 다시 먹고 나서 다시 찍을 수 없다. 방금 튀겨낸 튀김을 푹 담가 입에 넣는다. 파사삭하는 소리와 함께 짭짤하고 새큼한 소스가 입안에 들어온다. 최고의 맥주 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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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익힌 닭 요리도 먹었다. 익히지 않은 닭은 처음 먹어본다. 호스트는 메뉴를 앞에 두고 연신 내 눈치를 살핀다. 아무래도 내 반응이 궁금한 듯 싶다. 참치 타다끼처럼 안쪽은 아직 차가운 닭을 간장에 살짝 찍고 생 와사비를 얹어 먹는다. 다행히 비리진 않았다. 이 요리를 앞에 두고 우리는 연신 맥주 잔과 하이볼 잔을 기울이며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리와 술이 바닥을 보일때쯤 호스트가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집으로 움직일까? 뭐 또 먹고 싶은거 있어?

bcut_EB4992D7-8EE6-4BA0-8116-CC5512BEECDF[이건 유즈하이볼, 정말 잘 먹고 잘 마시고 다녔다]

야키토리가 먹고 싶어. 좋아 그럼 나가자. 내가 아는 집이 있어. 두번째 집으로 향했다. 금요일 밤답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나중에 인스타 댓글로 알게됐다. 전 품목 280엔의 토리키조쿠라는 야키토리 전문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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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바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앞에서 전형적인 머리띠를 한 종업원이 희뿌연 연기 속에서 열심히 쉬지 않고 야키토리를 구워내고 있었다. 일단 간단한 술과 안주부터 주문한다.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일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안주로 푸른콩을 먹는걸 본적이 있다. 에다마메라고 하더라. 작은 접시 가득 나온 푸른 콩을 하나 집어 이로 잘근잘근 씹어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를 빼 먹는 재미가 있다. 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테이블 위에 있는 소금을 약간만 쳐서 먹으면 더 맛있다. 캬베츠라는 양배추도 시켰다. 일본은 어쩜 그냥 양배추도 이렇게 맛있을까? 생양배추의 단맛과 아삭한 식감 그리고 새콤달콤한 양념 때문에 쉬지 않고 들어간다.

bcut_4487E163-C271-4416-80CC-B675776001FF[왼쪽부터 엉덩이, 오돌뼈, 그리고 심장]

시끌벅쩍한 분위기 속에 언제 주문했는지 모르는 야키토리가 나왔다. 닯의 심장과 오돌뼈 그리고 닭의 엉덩이 살이다. 아무래도 나를 위해 가장 하드코어한 것만 시킨 게 분명하다. 하나같이 맛있어서 배부른 줄도 모르고 게속 먹었다. 맛있게 먹는 내가 신기했는지 옆자리에 앉은 젊은 일본인들이 나를 보고 까르르 웃는다. 각자 서툰 영어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메뉴도 나눠 먹었다. 현지에 완전히 녹아든 기분. 여행자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먹고 마시는 와중에 다음 번엔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훌쩍 넘어갔지만 지나갔지만 호스트도 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웃고 떠들고 대화했다. 세 번째 집으로 이동하면서 또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내가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마트와 편의점에도 들렀다. 이곳에서 일본 사람들은 어떤 걸 제일 많이 먹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무엇인지로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일본 소주가 궁금하다고 하니 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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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집이다. 오사카 이자카야 대탐험의 대단원은 서서 마시는 일본 소주집이었다. 가게 한쪽에는 큰 통에 푹 익힌 오뎅이 국물에 몸을 담그고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이곳에도 역시 관광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호스트는 그 안에 있던 손님들과 하나같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여기 근처에 굉장히 유명한 일본극장이 있는데 그곳의 스탭이라고 설명해줬다. 벌써 일본에 10년 넘게 살았다는 호스트는 길거리, 술집, 심지어 화장실 앞에서도 친구를 만났다. 난 너무 친구가 많은 거 아니냐고 타파를 놀려댔다.

bcut_DF53E5DB-E0DB-4A0D-BE35-225CB48AC9F3[어쩜 이런것도 맛있을까?]

자리를 잡고 서면(?) 물과 얼음이 담긴 잔을 가져다 준다. 소주를 물과 얼음에 희석해서 마시는 미즈와리 방식으로 마시면 된다.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많이 먹어서야 도저히 들어가질 않는다. 안주는 굉장히 간단하게 시켰다. 간단한 묵어 숙회와 안주만 시킬 생각이었는데 호스트가 이건 꼭 먹어봐야한다며 어묵 국물에 푹 담가진 도가니와 무를 가져다 준다. 한 입 먹었더니 과연 맛있다. 안 먹었다면 후회할 뻔 했다.

bcut_2C1F7DA0-622D-4133-AC23-FF6838BCD225[왼쪽이 고구마 소주 오른쪽이 밀로 만든 소주]

이 두병의 술은 모두 호스트가 이곳에 킵해둔 소주다. 자세히보면 그동안 다녀갔던 사람들의 사인을 볼 수 있다. 왼쪽의 검은색 라벨이 고구마소주 오른쪽의 주황색 라벨이 밀로 만든 소주다. 모두 맛있는 술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이때쯤엔 취해서 무슨 맛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고구마 소주는 은은한 고구마향이 나고 밀로 만든 소주는 조금 더 위스키에 가까운 맛이었다.

bcut_09699C43-A348-4B10-9631-10B2E3989D2F[다음 번엔 꼭 이골목골목을 누비리라]

마지막 가게에서는 문을 닫을 때까지 마셨다. 그리고 신시야바치 근처에 있는 내 호텔까지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진짜 오사카 젊은 이들이 가는 바 골목도 지나갔다. 우리나라의 홍대쯤인 것처럼 보이는 골목이었는데, 한껏 치장을 하고 방탕한 분위기의 일본 젊은 이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관광객으로서는 쉽게 보기 힘든 오카사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에어비앤비 트립은 성공적이었다.

내일은 오사카에서 교토로 떠날 준비를 해야한다.


Part2. KY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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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는 여러모로 오사카와 달랐다. 훨씬 더 오래된 도시였다. 명품이 즐비한 거리와 힙한 바이브가 뿜어져 나오는 오렌지 스트릿과도 또 달랐다. 이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똑바로 마주하고 싶어졌다. 나처럼 게으른 여행자에게 이번 트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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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 신청한 투어는 ‘Discover the Alternative Fushimi Inari’였다. 아침 8시 반부터 4시간 동안 하이킹을 하며 후시미 이나리 신사와 그 주변의 절을 둘러보는 트립이었다.

bcut_A469F192-0663-4FF0-B7DE-E4E5BC0F39AA[저 통이 모두 사케다. 이곳은 물이 좋아서 사케도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전날 과음으로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비비고 8시 반 후시미 이나리 신사 앞에 모였다. 날은 조금 흐리고 쌀쌀했다. 아침이라 공기도 내 컨디션도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준비물은 단출했다. 편한 복장과 걷기 좋은 신발. 내가 도착했을 땐 호주에서 온 4인 가족이 이미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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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이 머니 서둘러 투어를 시작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닐까 궁시렁댔는데 신사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있었다. Fushimi(伏見区)는 숨겨진 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나리(稲荷)는 벼의 생장을 수호하는 신이다. 일본 문화엔 거의 문외한인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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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기대했던 것만큼 멋졌다. 이나리신의 메신저라고 알려진 여우상이 우리를 반긴다.이곳의 여우들은 모두 하나같이 패션센스가 좋았다. 붉은 색의 턱 받침을 두르고 있는 건 기본. 여우마다 목도리나 귀마개, 심지어 붉은색 아이라이너나 메니큐어를 바른 것도 있었다.

147BB162-5C29-4078-ADD4-2BCC9BF0CC7B-side[저 통을 흔들어 나오는 막대기에 써져있는 숫자로 점을 본다. 점괘를 읽어주는 호스트]

호스트는 조근조근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가 지루하지 않도록 중간중간 귀여운 농담이나 뒷 이야기도 적절히 섞어냈다. 일본 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였지만, 뭘 물어봤을때 막히는 것없이 술술 풀어내는 걸 보니 지식의 깊이가 상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알고보니 와세다 대학에서 일본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단다. tabby walker라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본을 투어하는 앱을 준비중에 있기도 했다. 6만 원대의 투어로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할 수 있다니, 나로선 꽤 이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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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자 모양의 붉은색 문이 늘어진 길 앞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모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직은 관광객들이 활동할 시간은 아니었고, 덕분에 이렇게 멋진 사진도 얻을 수 있었다. 여러분도 혹시 후시미 이나리를 가신다면 조금 이른 시간에 가는걸 추천한다. 

bcut_77AF5236-1B0B-4B88-8225-48443FB88129[한쪽엔 이걸 세운 날짜가, 다른 쪽에는 사람이나 기업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

산길을 따라 끊임 없이 이 문들이 이어져있었다. 기둥마다 새겨져 있는 글자는 이 기둥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들 혹은 기업들이다. 워낙 큰돈이라 요즘은 기업들도 많이 한다고 한다. 약 4km 정도 되는 이 길을 따라 이어진 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다 얼마야?

bcut_5E63A578-0994-4247-B549-CE511D560994bcut_4279483F-A585-432C-8118-32CBAE04C91F[이건 그냥 아이폰으로 찍은 이끼사진. 확대경으로 보면 열배는 더 신기하다]

앞서가며 쉬지 않고 흥미로운 점들을 쏟아내던 호스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아주 작은 돋보기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걸로 이끼를 관찰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웬 이끼람 하고 별 기대없이 동그란 렌즈에 눈을 가져다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날 신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훔쳐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열배 스무배로 확대한 그곳에는 멋진 숲이, 나무가 생태계가 있었다. 멋졌다. 하나의 돌에도 3cm마다 다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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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가 갑자기 숲을 가리켰다. 몇 개의 나무가 꺾인 거 말고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이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은 후시미 이나리에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나무가 꺾인 자리는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 날개짓이 서툰 용이 첫 걸음마를 떼며 여기저기 부딪힌 흔적이라고 믿었단다. 설명을 듣고 보니 평범해 보였던 숲위로 이제 막 눈을 뜨고 날개를 편 아기용이 이리저리 서툰 몸짓으로 날개짓을 하고 나무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인다. 사랑스러운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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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올라가니 길을 더 한산해졌다. 간간히 기도를 하러 온 어르신을 만날 뿐이었다. 숲은 더 초록색이 되었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던 문들은 붉던 옷이 한 톤 죽었다. 모든 것이 물 먹은 것처럼 맑고 투명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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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정도의 하이킹을 마치고 드디어 평지다. 깨끗하게 정리된 일본의 주택가는 일요일 아침의 고요한 분위기 덕분인지 한 결 더 정갈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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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묘인(光明院)이라고 부르는 사찰이다. 너무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진다. 눈에 보이는 이 멋진 풍경을 서울에 있는 나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세상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 지는것 같은 풍경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자꾸만 셔터를 누르는데. 아이폰 속 사진은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시시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속상해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호스트였다. 정원이 가장 잘 보이는 마루에 앉아 가볍게 양발을 흔들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콧노래 같은걸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들리진 않았지만. 아이폰을 주머니에 얼른 집어 넣고 달랑 옆에 앉는다. “정말 멋지네요.” “여길 제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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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몇 번이나 투어를 해요? 6번 정도요. 헤엑~! 며칠 있었다고 일본인의 리액션이 꽤 자연스러워졌다. 엄청 건강해지겠다. 조금 까맣고 건강해 보이는 피부톤에 웃으면 가늘게 쳐지는 눈매의 호스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맞아요.

bcut_E27879DB-81A8-46BD-8B87-183BCE98E230[불이 나는 걸 막기위해 기와에 물을 그려넣었다, 그럼 물의 신의 지켜줄거라고 믿었으니까]

다음에 갈때도 또 에어비앤비의 트립을 신청할거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예스다. 내가 만났던 두 명의 호스트 모두 이 일은 직업이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트립으로 만나는 모든 일들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껏 웃고 즐기고 그 순간에 집중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은게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역시 이 두 번의 트립이 떠오를 것이다.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