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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맨으로 음악 듣는 내가 창피해?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자. 디에디트의 TMI 전문 필자, 음악평론가 차우진이다. 오늘도 역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음악이라기 보다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자. 디에디트의 TMI 전문 필자, 음악평론가 차우진이다. 오늘도…

2019. 01. 14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자. 디에디트의 TMI 전문 필자, 음악평론가 차우진이다. 오늘도 역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음악이라기 보다는 음악을 듣는 기기에 가깝긴 하지만.

stevejaob_walkman[이미지 출처: 영화 <스티브잡스>]

애쉬튼 커쳐가 나온 거 말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나온 영화 <스티브 잡스>의 후반부. 1998년 아이맥 런칭을 위한 프리젠테이션 직전, 주차장에서 딸 리사와 만난 잡스는 문득 리사가 갖고 있는 워크맨을 보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네 주머니에 음악을 넣어줄게. 1,000곡 정도 들어갈거야.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려고 벽돌을 들고 다닐 순 없어. 우린 야만인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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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songs in your pocket’은 2001년에 출시된 아이팟 1세대의 슬로건이었다. 그래서 저 대사에 심쿵했지만, 한편으론 ‘근데 잡스 아저씨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봤다면 아이처럼 즐거워했을텐데!’란 생각도 했다. ‘가오갤’에서 스타로드가 들고 다니는 워크맨은 소니가 1979년에 처음으로 발매한 워크맨으로 TPS-L2 라는 모델이다.

MzE4MzE2NA[가오갤의 스타로드가 들고다니는 소니의 TPS-L2 모델]
TMI: 소니의 워크맨이 최초의 카세트 플레이어는 아니다. 다만 최초로 ‘경량화된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기존의 플레이어에는 스피커와 녹음 기능이 있었지만, 소니는 경량화를 위해 그 기능들을 없애버렸다. 한편 카세트 테이프를 처음 상용화한 곳은 네덜란드의 필립스였는데, 1963년이다. 당연히 최초의 카세트 플레이어도 필립스에서 만들었는데 EL-3300이란 이름이었다. 소니의 워크맨이 등장한 후 마쓰시다, 파나소닉, 아이와, 산요 등의 일본 기업들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시대를 이끌었다.
elsf_ererw[최초의 카세트 플레이어 필립스의 EL-3300] 

‘벽돌’같은 이 워크맨의 특징은 헤드폰 단자가 두 개라는 것과 마이크 버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을 누군가와 함께 들으면서, 무전기처럼 대화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워크맨 초호기’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쪽으로도 임팩트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는 역사상 처음으로 음악을 공공장소에서 혼자 들을 수 있게 만든 디바이스이기 때문이다. 레코딩 기술이 개발되기 전, 음악은 오직 ‘라이브’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음악 감상은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취미였고, 당연히 귀족적 라이프스타일(이를테면 ‘교양’)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레코딩 기술은 이렇게 고급 취향이던 음악 감상을 대중화, 보편화시키면서 ‘음악의 민주화’라고 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도 음악을 길거리에서 혼자 듣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때문에 워크맨이 등장하기 전까지 음악은 ‘함께 듣는’ 행위가 중요한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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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소니의 워크맨은 특허권 침해 소송을 겪었다. 1972년 안드레아스 파벨이라는 엔지니어가 ‘스테레오 벨트’란 이름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발명했는데, ‘소비자들이 공공장소에서 바보처럼 헤드폰을 쓰지는 않을 것’이란 이유로 제조사들에게 거절당하는 바람에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77년에 전세계 특허 등록을 했고, 소니의 워크맨이 출시된 직후에 침해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은 26년 뒤인 2003년에서야 파벨이 승소하며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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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맨은 이런 문화적 경험을 작살내버렸다. 이후 음악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것이 되었고, 나의 취향을 찾는 일이 중요해졌다. TPS-L2는 이런 전환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기존의 음악 감상 행태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모순적인 기능은 아마도 마케팅과 엔지니어링이 극적으로 타협한 결과가 아닐까 싶은데, 이후 모델에서는 이 기능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대신 오토-리버스, 돌비 스테레오, 잡음 제거, 무선 리모콘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고 때로는 수중용, 아동용, 태양광 충전, TV겸용 등 오버 스펙 모델도 출시하면서 소니의 워크맨 시리즈는 8~90년대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시장의 절대 강자로 자리 잡았다.

bcut_IMG_0198[포커스는 나갔지만…이건 갬성. 예쁜 테이프로 발매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한국계 미국인 인디 뮤지션의 앨범]

그러니까 사실 아이팟(혹은 아이폰)의 뿌리는 워크맨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긴 아이팟이 한 거라곤 기껏 mp3를 플래시 메모리가 아닌 하드 디스크에 저장하고, 자동 동기화로 악명높은 아이튠즈로 음원 다운로드 시장이라는 걸 만들어 21세기의 음악 산업 구조를 뒤바꾼 것 말고는 없지 않나? (이봐…) 그야말로 ‘인류가 아무데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필립스와 소니 덕분이라고 할 수밖에. (이봐…!)

Sony_D50_Discman_[소니 최초의 CDP D-5]
TMI: 워크맨이 출시된 1979년은 공교롭게도 필립스와 소니가 함께 최초의 콤팩트 디스크(CD)를 개발한 해이기도 하다. 기존 LP와 카세트 테이프의 음향 품질과 내구성을 향상시킨 매체로 홍보되면서 음악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는데, 1984년이 되어서야 휴대용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소니는 ‘디스크맨(Discman)’이란 브랜드로 최초의 휴대용 CDP인 D-5를 발매했는데, 디스크맨은 2000년에 ‘CD워크맨’이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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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2년 전 즈음에 불현듯 갑자기 워크맨과 휴대용 CDP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고나라에서 운좋게 몇 개를 구입한 후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다. 가끔 워크맨이나 CDP를 갖고 나가 음악을 들을 때도 있는데, 최근 굿즈의 개념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발매하는 음악가들도 있어서 소소하게 앨범들을 사 모으기도 한다. 주변의 지인들, 주로 음악 글을 쓰거나 음악 생산에 관계하는 사람들 중에는 1980년대나 90년대처럼 ‘더블데크’로 믹스 테잎을 만들어 선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주행이란 게 이런 건 아니었을텐데…)

TMI: 사실 ‘워크맨’은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라 당시 미국 진출을 고민하던 소니는 새로운 브랜드를 고민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만약 ‘워킹맨’이라고 이름을 바꿨다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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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가끔 여전히 음반을 사고(물론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고등학생 때 듣던 스키드로우의 “Wasted Time”을 굳이 워크맨으로 들으면서 출근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긴 한다. 뭐 이유가 있나, 그저 우리 모두는 거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떤 페이지를 갖고 있다고 밖에.

bcut_IMG_2316[내 방의 모습, 하나하나 사연이 있어서 버리지 못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페이지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굳이 부끄러워말고. 아니 다들 삼성 옙으로 SG워너비 듣고, 버즈 듣고 그러지 않았어요? <포켓몬스터> 보겠다고 브라운관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고 막. (이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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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소니는 2010년 10월에 워크맨의 판매를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2018년 현재 소니에게 제일 중요한 건 ‘플레이 스테이션’과 ‘스파이더맨’이다. 그리고 이건 그 둘의 합작. 

TMI 부록:
디어 마이,
마이 포터블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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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소니의 WM-EX1은 워크맨 출시 15주년 기념 모델로, 1994년에 발매되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세로로 꽂아 넣는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인기가 많았고, 워크맨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제품이기도 하다. 나는 이걸로 테이프를 듣는데 요새 상태가 별로라서 수리를 맡길 예정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수리 가능한 곳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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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소니의 D-E01은 디스크맨 출시 20주년인 1999년에 발표된 모델로 당시 1만 대 한정판으로 출시되었다. 슬라이딩 방식으로 CD를 넣고 빼는 독특한 방식이 유명한데, 오직 이 모델에만 적용되었다. 덕분에 다른 모델들에 비해 조금 두껍지만, 한정판 모델답게 음질은 좋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괜히 한 번 꺼내봤는데 모두들 스마트폰을 보느라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서 내가 좀 창피했음…

TMI: 블루투스 기능이 있는 CDP도 있다. 이 기능이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을지 궁금하지만 일단 소리는 잘 나온다. 사실은 이때 말고는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다. 도대체가 쓸모 없는 기념품 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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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차우진

음악/콘텐츠 산업에 대한 뉴스레터 '차우진의 TMI.FM'을 발행하고 있다. 팬덤에 대한 책 [마음의 비즈니스], 티빙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을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