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ICK

그 시절, 우리가 머물렀던 장소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2010년 가을, 서울 세종로사거리 교보문고 글판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2018. 12. 18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2010년 가을, 서울 세종로사거리 교보문고 글판에 걸렸던 글귀다. 버스로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그 글귀를 곱씹곤 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이 나를 말해준다.

2018년에 귀가 아프게 들은 단어 몇 개를 나열해보자. 경험, 공간, 브랜딩. 붕 떠있는 이 단어들의 사이를 엮어보면 결국 “공간과 그 공간을 향유하는 경험 자체가 브랜딩이 된다”는 문장이 된다.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졌는데, 오히려 오프라인의 경험이 각광받는 시대라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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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디에디트가 방문했던 의미있는 공간 중의 하나]

소유한다는 말의 개념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어떤 물건을 옷장이나 서랍 안에 붙잡아두지 않아도,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경험을 소유’하는 행위가 되었다. 좋은 공간은 좋은 시간을 만든다. 단순히 인스타그램 인증샷 올리기 좋은 장소를 넘어, 콘텐츠와 맥락이 있는 공간 말이다. 물론 얼마나 모호한 표현인지 잘 알고 있다. 경험과 공간이라니! 그래서 준비했다. 솜씨 좋게 잘 풀어놓은 2018년의 공간을. 올 한 해 동안 디에디트 에디터들이 소유했던 경험의 일부를 나누고 싶다.


애플스토어 시카고 미시건 애비뉴
Editor H’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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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스토어’가 주는 경험은 각별하다. 단순히 내가 앱등이라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투명한 유리 큐브 안의 사과 로고와 빨려드는 듯한 나선형 유리 계단은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도맡는다. 애플 스토어의 두 가지 키워드는 ‘통일성’과 ‘변주’다. 해외 어떤 도시에 가도 똑같은 서비스, 똑같은 나무 테이블, 똑같은 제품. 눈이 마주치면 하이파이브를 청할 만큼 발랄한 스텝들의 접객 태도도 대부분 비슷하다. 하지만 공간을 풀어내는 방식만큼은 그 도시와 역사에 맡게 끊임없는 변주를 시도한다. 올해 만났던 애플 스토어 중 인상적이었던 곳은 단연 시카고 강변에 위치한 애플 미시건 애비뉴다. 시카고 강과 파이오니어 광장을 잇는 지점에 자리한 이 거대한 유리 건물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투명한 건물 덕에 시야가 탁 트여 있는데다, 내부의 화강암 계단이 바깥의 광장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구조라 안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건물 안에서 시카고 강을 바라보면 마치 물 위를 부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얇은 탄소 섬유 소재의 지붕을 사용했으며, 유리 전면을 가리지 않도록 내부에 있는 4개의 기둥만으로 건물 전체를 지탱하게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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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라운 건 이 투명한 건물 안으로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아이폰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세션을 진행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 의자에 앉아 배우고, 이야기 나누고, 놀고 있었다. 마치 항상 들리는 동네 사랑방처럼 말이다. 물건을 사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불규칙하게 놓인 나무 의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니 애플이 만들고 싶은 공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경품 행사나 춤추는 풍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피크닉
김작가’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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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순간에는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카메라에 담지 않고 눈에 담으면 더 오래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내겐 피크닉이 그런 공간이었다. 갤러리와 카페, 바가 함께 있는 피크닉은 ‘힙’하거나 ‘핫’하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단 한 번도 내려본 적이 없는 회현역에 내려서 낯선 빌딩을 지나 초면인 골목을 몇 차례 꺾고 나서야 피크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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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끝이 아니다. 피크닉으로 가는 약간 경사진 내리막길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면 큰 나무에 살짝 가려진 갈색 벽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나는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를 보기 위해 방문했었지만, 어떤 전시였어도 피크닉을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을 것 같다. 지하에서부터 시작하는 전시가 옥상에서 끝나면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지는데, 회현역에서부터 옥상까지 이어진 스토리텔링은 완전한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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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호텔
Editor M’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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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난 스웨덴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웨덴 엘름홀트 이케아 호텔에. 이 호텔은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로 시작했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씨 때문에 가구를 사러 왔던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컵부터 스툴까지 모든 것이 이케아의 물건으로 채워진 이곳은 그자체로 거대한 쇼룸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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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게까지 좋을 건 없는 호텔이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올 한 해 좋은 곳을 많이 다녔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이 호텔이  생각난다. 화려함 같은 건 MSG 같아서 맛본 순간엔 그게 최고인 것 같다가 금세 질리거나 잊어버리고 만다. 검소하지만 궁색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적당한 온도와 거리. 최소한의 재료로 최고의 효율을 취한 그들의 환대는 엄마가 해준 집밥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집이란 스케치북에 이케아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무궁무진하다. 아직 새햐안 도화지 위에 이케아가는 노랑색과 파란색 크레파스를 들고 선을 그었을 뿐이다. 난 그들이 그린 그림의 끝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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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
신동윤’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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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렌탈샵으로 많이 남아있는 수많은 츠타야부터 라이프스타일 매장으로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시부야의 츠타야, 확장 가능성을 너무 잘 보여준 후타고타마가와의 츠타야 카덴. 일본에는 수없이 많은 츠타야가 있지만 그럼에도 다이칸야마의 츠타야는 유난히 특별하다. 3개의 건물, 6개의 관으로 만들어진 서점. 일부러 뒤틀리게 지어 반드시 3개 관을 방문하도록 설계한 구조. 이런 외적인 면모들도 분명 우리들에게 두근거림과 기대감을 선사하겠지만, 다이칸야마 츠타야의 특별함은 취향에 대한 분석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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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2관에 있는 수십 년 치 잡지 아카이브는 츠타야가 이해한 과거 유행, 취향을 의미한다. 그저 여기서 끝난다면 흔히 하는 ‘과거 데이터 분석’이겠지만, 츠타야는 조금 더 사용자에 집중한다. 수없이 많은, ‘렌탈샵 츠타야’에서 나온 고객들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비교해 나름대로 ‘취향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런 취향 알고리즘에 기반한 라이프스타일의 제안과 전시가 츠타야의 생명력이다. 양적 팽창에서 이어지는 질적 팽창. ‘당연히 데이터가 많으면 질적 팽창을 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애초에 수년 뒤의 미래를 보고 저런 데이터를 꾸준히 모은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츠타야가 서점의 미래냐고? 그건 모르겠다. 나는 일본어를 제대로 못 하는 탓에 츠타야에 간다고 책을 각잡고 읽어대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과거에서 유의미를 찾을 줄 아는 츠타야가 미래의 무언가를 상징할 거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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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관
김작가’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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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반추하기에 좋은 계절이야” 나는 12월의 절반이 이미 흘렀다는 것을 알고 잠시 김난도에 빙의해보았다. 올해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음…프레디 머큐리? 어벤져스? 무한도전 방영 종료? 아니 아니다. 미시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것, 1월부터 12월까지 하나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마음 한 켠에 숨어있던 단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건 바로 ‘취향’. 올해만큼 취향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본 적이 있을까.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취향은 먼지 쌓인 단어에 가까웠다. 그런 단어를 트렌드로 이끈 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취향을 대표하는 공간은 단연코 취향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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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관은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공간이었다. 카페도, 선술집도, 공유오피스도 아닌 살롱이라는 곳이었고, 멤버십으로 운영되며 회원들에게는 아이돌, 잡지 등 다양한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을 꾸준히 개설했다. 취재 때문에 갔던 것을 제외하고 두 번 정도를 더 방문했었는데, 다른 손님들의 말이 기억난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그게 취향관의 매력인 것 같다. 계속 머물고 싶게 하는 곳, 살고 싶은 곳. 물론 나도 속으로 많이 속삭였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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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스토리지
Editor M’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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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현대카드 스토리지에 다녀왔다. 매번 흥미로운 전시를 선보이는 스토리지만 이번 가파도 프로젝트는 남달랐다. 가파도는 섬이다.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15분 이나 더 가야하는 외딴곳에 있으며 걸어서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섬. 사방이 평평한 이곳은 나무도 그늘도 없어서 거세게 부는 바람과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2013년 조금씩 사그러드는 이 섬을 다시 꽃 피우기 위해 시작했다. 주민들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꼬박 6년을 기다렸고,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 중이다. 이 시간과 정성을 ‘대기업의 마케팅’이란 말로 치부하기엔 그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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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지하 3층, 가로 15m 세로 3m의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스크린이다. 해가 지고 뜨는 가파도의 모습을 담은 이 스크린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섬은 꼭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라져갈 것들에 대한 성의, 빠르게 살아가는 우리 속도에 대한 고민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공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스토리지엔 작은 섬과 큰 바다가 웅크리고 있다. 이것이 내가 현대카드 스토리지 그리고 가파도를 올해의 공간으로 뽑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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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게임 센터
Editor H’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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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팝업 스토어는 홍대 앞에 꾸려졌던 샤넬의 ‘코코 게임센터’다. 샤넬과 홍대라니. 샤넬과 게임센터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모여 재밌는 그림이 나왔다. 이름처럼 레트로풍 오락기가 가득한 게임센터였다. 입장하며 받은 샤넬 코인을 넣으면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샤넬 마크가 커다랗게 그려진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플라스틱 버튼을 눌러 투명한 캡슐을 뽑았다. 얄팍한 화장품 샘플이 들어있었다. 뺨에 발그랗게 볼터치를 한 20대 초반 소녀들이 얼굴에 샤넬을 덧바르고, 코코 로고가 새겨진 모형 자동차에 올라타 인증샷을 찍었다. 가장 럭셔리한 브랜드를 가장 케주얼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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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Kitsch)하다는 표현이 이렇게 어울리는 장소가 있을까. 엘리트의 의도된 일탈은 이렇듯 재미있는 법이다. 샤넬 로고가 빨갛게 그려진 투명 캡슐이 벽 한 쪽에 가득 붙어 있었다.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음이 연이어 들리고,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끝없이 소비됐다. 팝업 스토어 2층에 구입을 위한 매장이 따로 마련돼 있긴 했지만 판촉에 목이 마른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우린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나중에 언젠가는 샤넬을 사러 오렴”하는 도도한 메시지가 포함돼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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