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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m의 우주, 반클리프앤아펠

안녕. 디에디트의 파고다 공원, 올드리뷰어, 여러분이 사지 않을 제품만 골라서 소개하는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아름답지만 구입하기 힘든 브랜드를 소개하려...
안녕. 디에디트의 파고다 공원, 올드리뷰어, 여러분이 사지 않을 제품만 골라서 소개하는 객원필자…

2018. 10. 04

안녕. 디에디트의 파고다 공원, 올드리뷰어, 여러분이 사지 않을 제품만 골라서 소개하는 객원필자 ‘기즈모’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아름답지만 구입하기 힘든 브랜드를 소개하려 한다. 오늘 소개하는 브랜드는 반클리프앤아펠(Van Cleef & Arpels)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브랜드에서 나온 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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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클리프앤아펠은 내가 직접 차고 싶은 시계는 아니다. 주로 여성용 시계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돈을 잔뜩 벌면 나를 만나 그 동안 고생한 불쌍한 아내에게 주고 싶은 시계다. 사소한 문제는 있다. 비싸다. 그래서 가난한 나는 아직 꿈만 꾸고 있다. 어서 빨리 카메라, 오디오, 기타 전자제품 할부가 끝났으면 좋겠다. 반클리프앤아펠 시계는 대부분 수천 만원을 호가하고 일부 모델은 억대가 넘는다. 왜 그리 비쌀까? 우선 기계식 시계이기 때문이다. ‘스와치 시스템51’ 같은 저렴한 기계식 시계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계식 시계는 무척 비싸다. 오늘 또 다른 주제가 기계식 시계다. 그래서 뒤에 다시 얘기하겠다. 또 반클리프앤아펠은 원래 아름다운 보석 브랜드다. 그래서 그들의 시계에는 보석이 잔뜩 박혀 있다. 태생적으로 비쌀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보석만 잔뜩 박힌 시계에 내가 혹했을 리 없다. 뭔가 기계 마니아를 홀리는 메커니즘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반클리프앤아펠은 주얼리 워치지만 뭔가 특별하다. 아래 모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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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모델은 ‘레이디아펠 퐁 데 자모르’라는 모델이다. 반클리프앤아펠 시계 중에 가장 유명한 시계다. 이 시계의 다이얼을 주목하자. 두 연인이 보일 것이다. 우산을 쓴 여자는 시간을 가리키고 남자는 분을 가리킨다. 두 연인은 시간을 알려주며 동시에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12시 정각이 되면 만난다. 키스인지 뭔지를 1분간 수행하고 다리 양단으로 이동한다. 12시간마다 두 연인이 만나는 드라마가 손목 위의 4cm도 안 되는 공간에서 매일 펼쳐진다. 이 모델은 포에틱 컴플리케이션(Poetic Complication) 라인에 있는 모델이다. 한국어로 ‘시적인 기계식 시계’정도로 표현된다. 단순히 시간만 표시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표시하는 방법에 상상력을 부여했고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래서 시계를 ‘시’의 차원까지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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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단순해 보이는 움직임이지만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은 공이 들어간다. 시간이 1분씩 흐를 때마다 1/60씩, 1시간이 흐를 때마다 1/12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무브먼트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 이 무브먼트는 수백 개의 톱니바퀴, 스프링과 나사로만 구현해 내야 한다. 겨우 3.8cm의 지름, 1cm 남짓한 두께 안에서 말이다. 연인 뒤를 장식한 푸른색 배경에도 엄청난 공이 들어간다. 장인이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되어 내려온 전통적 에나멜 기법으로 채색하고 수 차례 구워서 변질되지 않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1906년부터 시작된 반클리프앤아펠의 보석 가공 기술로 라운드를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화이트 골드로 다리를 조각한다. 이 정도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반클리프앤아펠은 1억 4천 만원의 가격표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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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모델은 ‘미드나잇 플라네타리움’라는 모델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천문학의 서사시’다. 이 시계는 정말 독특한 시계다.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 가미되어 우리가 이 시계를 차고 있는 동안 같은 화면을 단 한번도 볼 수 없다. 시계 다이얼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독특한 핸즈 외에 몇 개의 작은 구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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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슬들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을 상징한다. 놀라운 것은 이 행성들이 실제 공전 주기로 회전운동을 한다는 사실. 즉, 수성은 88일마다 한 번씩 돌고 토성은 29년에 한 바퀴를 돈다. 물론 이것도 태엽과 나사와 스프링으로 만든 기계식 무브먼트다. 이런 무브먼트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상상조차 안 된다. 너무 탐이 나지만 문제가 있다. 토성이 한 바퀴 도는 것을 보려면 29년을 견뎌야 한다. 컵라면 물 붓고 3분도 못 버티는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심지어 지금 내 나이에 구입하면 토성이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다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 환불 받아야 할까? 아니다. 자식에게 물려주면 된다. 이 시계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태양계의 유구한 시간을 4cm의 손목 위에 펼쳐 놓았다. 내가 종부세를 잔뜩 낼 수 있는 부자라면 이런 시계를 소유하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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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델 역시 다른 시계 메이커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담긴 모델 ‘롱드 데 빠삐옹’ 워치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나비의 교향곡’ 정도다. 시계 중앙에는 구름이 있다. 구름 사이에 노란 나비의 날개가 보인다. 이 무브먼트는 하단의 제비가 시간을 가리키고 구름 사이에 나비가 분을 표시한다. 구름 사이에 나비는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다. 세 마리의 나비가 있어 각각 30분, 15분, 15분씩을 담당한다. 나비가 보일 듯 말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시계는 유치하지 않고 과하지도 않으면서 우아함을 담아내는 반클리프앤아펠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계다. 다이얼에는 역시 에나멜 기법이 가미됐고 라운드에는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어 우리가 살 수 없도록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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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시계가 있지만 스크롤 관계상 하나만 더 소개한다. 이 시계는 ‘미드나잇 인 파리’다. 영화 제목 같은 이 작품은 실제 파리에서 보는 별자리를 4cm의 다이얼에 그대로 재현했다. 무브먼트는 1년 주기로 회전하면서 실제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를 정확히 보여준다고 한다. 아날로그 시계지만 매일 워치페이스가 바뀌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을 아날로그로 구현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가?

Article_Legends_Estelle-and-Alfred_U-B1[에스텔 아펠 & 알프레드 반 클리프, 1896년]

반클리프앤아펠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시계를 만들게 된 것일까? 그들의 역사를 잠깐 짚어보자. 19세기 보석상의 딸이었던 에스텔 아펠(Estelle Arpels)과 알프레드 반 클리프(Alfred Van Cleef)는 1895년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만남을 기념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함께 창조하고 싶어 했고 자신들의 이름을 따 ‘반클리프 앤 아펠’이라는 보석 브랜드를 만든다. 보통의 부부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갈등이나 앙금을 창조하는 것에 비해 참 생산적인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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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골드와 다이아몬드, 사파이어다]

이들은 초창기에 주로 보석을 만들었다. 현재도 반클리프 앤 아펠은 까르띠에, 불가리 등과 함께 세계 최고의 보석 브랜드로 유명하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시계를 만들기로 하고 유럽의 장인들과 더불어 보석이 장식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다만 반클리프앤아펠은 전문 시계 브랜드는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시계는 일반 주얼리 시계와는 좀 다르다. 그냥 보석만 박아도 충분히 팔 수 있지만 그들은 낭만과 상상과 시를 시계에 집어 넣는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럽 최고의 무브먼트 장인들과 협업하고 잊혀져 가는 에나멜 기법을 복원하고 연구하며 적용한다. 그래서 보석 브랜드지만 전문 기계식 시계 브랜드 못지 않은 명성과 인정을 받고 있다.

이제 기계식 시계는 왜 그리 비싼지에 대해 얘기하며 끝을 맺어야겠다. 사실 기계식 시계의 가격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겨우 손목에 차는 작은 액세서리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한 디자인에 평범한 가죽 밴드 시계가 수백 만원을 호가하고 약간 디자인이 특이하거나 특별판이 붙은 제품은 수천 만원대가 흔하다. 이름부터 좀 럭셔리하고 발음하기 힘든 브랜드, Patek Philippe(파텍필립), jaeger lecoultre(예거 르쿨트르), Lange und Sohne(랑에 운트 죄네) 같은 브랜드는 수억 원대의 시계도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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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놀라운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도 많이 틀린다. 틀리는 것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때는 느리고 어떤 때는 빠르게 가기도 한다. 스프링과 나사, 톱니바퀴 등으로 만들어진 물리적 시계는 지구의 자전에도 영향을 받고 고도, 날씨, 습도 등등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은 죄다 영향을 받는다. 얼마나 고장이 잘 나는지 옛날에는 동네마다 시계수리점이 있을 정도였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수천만 원짜리 기계식 시계 역시 어딘가 살짝 부딪혀도 수리센터에 입고해야 한다. 심지어 팔만 힘차게 휘둘러도 고장 날 수 있다. 시간이 틀리는 것 정도는 고마울 정도다. 시계의 주기능이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라면 기계식 시계는 낙제점이다. 정리하자면 시간도 잘 틀리는 불량품을 수천 만원씩 파는 셈이다. 그런데도 비싸게 팔린다. 기계식 시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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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클리프앤아펠이 아마 여러분에게 힌트를 줬다면 좋겠다. 그들은 인간이 4cm 정도의 다이얼에 구현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어 낸다. 이 시계 내부에는 동력을 이동시키는 방법을 이해한 이후로 인간이 고안해 낸 아날로그 기계 조립의 모든 노하우가 담겨 있다. 장인들은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에 독특한 무브먼트를 집어 넣기 위해 돋보기를 껴가며 정밀한 조립을 한다. 하나하나 스프링을 끼우고 톱니바퀴를 직접 맞물려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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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츠시계나 스마트 시계가 있는데 왜 굳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조립해야 하냐고 묻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은 ‘수직’으로만 발전하지 않는다. 더 이상 유효성이 없는 옛 기술 역시 ‘수평’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간다. 기계식 시계는 이제는 비효율적이어서 쓰임새가 줄어가는 인간의 아날로그 기술을 여전히 발전시키고 탐구시켜 나간다. 자동차가 탄생했지만 여전히 마라톤 기록을 재고 카메라가 발명됐지만 화가가 존재하는 이유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공간에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한계를 계속해서 탐구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인 거다.

Plonger au coeur d'une montre mécanique

소재 역시 유사 이래 인간이 발견하고 다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금속과 소재가 쓰인다. ‘사파이어 크리스탈’은 투명하면서도 단단해 다이얼을 보호한다. 케이스를 이루는 골드나 화이트골드 합금은 단단하면서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주변을 장식하는 다이아몬드는 오묘한 빛을 내고 가장 강력한 강도를 가졌다. 우리가 발견한 가장 좋은 소재를 가장 적합한 곳에 사용해 완성품을 만드는 과정 역시 인간의 소재공학을 총망라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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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4cm짜리 화폭에 가장 아름답고 변하지 않을 그림을 그린다. 변하지 않는 색상을 위해 에나멜로 색을 칠해 수 차례 구워낸다. 여기에 상상을 담고 예술을 담으며 스토리를 담는다. 회화와 조각, 후처리 기법 등 모든 회화적 기법이 아낌없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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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보면 황홀해진다]

이 모든 과정은 단계별로 여러 명의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조립하고 손으로 장식해야 한다. 따라서 대량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든 장인들이 달라 붙어도 한 달에 1~2개 밖에 못 만드는 시계도 있다. 이 정도면 기계식 시계의 가격이 그나마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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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모

유튜브 '기즈모' 운영자. 오디오 애호가이자 테크 리뷰어. 15년간 리뷰를 하다보니 리뷰를 싫어하는 성격이 됐다. 빛, 물을 싫어하고 12시 이후에 음식을 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