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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돔페리뇽

조금 있으면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설이 더 큰 명절인지 추석인지는 확신하지 못 하겠다. 어렸을 적엔 세뱃돈을 받는 설이 더...
조금 있으면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설이 더 큰 명절인지 추석인지는 확신하지…

2018. 09. 18

조금 있으면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설이 더 큰 명절인지 추석인지는 확신하지 못 하겠다. 어렸을 적엔 세뱃돈을 받는 설이 더 크다고 느꼈고, 지금은 날짜가 잘 빠져 더 오래 쉬는 날이 장땡이다.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집 명절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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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나, 여동생. 우리 네 식구만 조촐하게 차례를 지낸다. 이젠 동생도 미국으로 건너가버렸으니 세 식구다. 친척들은 정말 가끔 본다. 큰 아버지를 비롯 대부분의 고모들은 창원, 부산 등 아직도 경상도에 터를 잡고 살고 계시고, 서울과 부산은 너무 멀고 명절의 고속도로는 끔찍하니까. 그렇다고 가족들의 사이가 나쁜건 아니다. 그냥 굳이 명절이 아니라 편할 때 만나는게 더합리적이라고 판단했을 뿐.

말이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집의 명절을 당일날 네 가족이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는게 전부라는 이야기였다. 일년에 딱 두 번. 이정도는 그동안 쌓인 것들을 풀어내고 덕담을 나누기 적당한 횟수다. 우리부모님은 술은 좋아하지만 집에서는 잘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안주와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분들이니까. 예외가 있다면, 명절이다. 매번 똑같은 구성이지만 제삿밥은 언제나 참 맛있다. 일년에 두 번, 제사를 치르고 난 뒤 상을 물리고 단촐한 네 식구가 둘러 앉아 전과 나물을 안주삼아 술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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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술은 내가 고른다. 우리 부모님은 딸이 고른 술은 대부분 좋아해주시지만, 엄마가 특히 막걸리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때마다 재미있는 막걸리를 구해간다. 올 추석엔 이걸 마실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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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도가 福順都家 손막걸리. ‘한국의 돔페리뇽’이라고 불리던 꽤 명망있는 막걸리다. 복순이란 순박함은 복순도가 김민규 대표의 어머니 이름에서 따왔다고.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또 그 어머니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빚은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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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는 항아리부터 특별하다. 울산 울주군 언양의 쌀을 볏짚으로 항아리 속을 채워 태우고 그걸 다시 따가운 햇살 아래 내놓아 말린다. 김가네가 술을 빚으면 작은 동네가 들썩였다. 어르신들은 ‘김가네 며느리가 빚은 술맛이 기가 막히다’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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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항아리 안에서 익어가는 뽀얀빛의 술은 시간이 지나면 입을 뻐끔대며 숨을 쉰다. 샴페인처럼 올라오는 고운 기포는 누룩이 발효되면서 생기는 천연 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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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술을 멋지게 만든건 김민규 대표의 공이다. 육감적인 S라인의 콜라병이 미국의 라인이라면, 복순도가 손막걸리의 은은한 곡선은 한복의 선이다. 1리터가 조금 안되는 935ml 용량은 생각보다 커서 놀랍지만, 유려한 곡선 때문인지 부담스러운 느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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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도가 손막걸리를 열기 위해서는 약간의 의식이 필요하다. 먼저 거꾸로 뒤집어 가라앉았던 침전물이 섞이도록 한다. 미색을 띄는 투명한 액체가 안개처럼 뿌옇게 변하면 병을 45도 정도 기울여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3번에서 5번 정도 반복한다. 안에 있는 술과 탄산이 급하게 튀어나오지 않고 최소한의 탄산만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건 영상으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상아빛의 색과 식욕을 자극하는 새금한 향 덕분에 눈, 코 그리고 입이 즐겁지만 자글대는 소리와 뽀글대는 기포덕분에 귀와 피부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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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사단이 난다. 아니 난 한다고 했는데 터져버렸다.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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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좋다. 달고 시지만 불량식품 같은 맛은 아니다. 스무살 때 학교앞 주점에서 마시던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 맛과도 확실히 다르다.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음… 맛의 그래프에서 단맛이 왼쪽 끝이고 신맛이 오른쪽 끝이라면 그 가운데를 촘촘하게 채워주는 그런 부피감이 있달까. 그 촘촘함을 채워주는 건 자잘한 탄산이다. 왜 한국의 샴페인이라 하는지 알겠다. 아주 조금만 머금어도 더 잘게 쪼개진 탄산이 입 안에서 구른다. 데굴데굴데굴. 자글자글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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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린 생쌀을 씹었을 때 느껴지는 뭉근한 닷맛과 입안에서 부셔지는 조직감, 곡물이 발효되었을 때 느껴지는 새큼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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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핑계로 사무실에서 술을 땄다. 맛을 음미한다고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1리터에 가까운 막걸리는 거의 다 비웠다. 안주가 없어도 빵처럼 넘길수록 구수하고 자꾸만 마시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정말 돔페리뇽 정도로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술이다. 올 연휴 가족끼리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잔을 나누는 일도 꽤 의미있는 일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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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