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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발렌타인

다음 주가 벌써 설이네. 휴일을 가늠하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는 날이 보인다. 2월 14일. 난 발렌타인 데이가 싫다.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다음 주가 벌써 설이네. 휴일을 가늠하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는 날이 보인다. 2월…

2018. 02. 09

다음 주가 벌써 설이네. 휴일을 가늠하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는 날이 보인다. 2월 14일.

난 발렌타인 데이가 싫다. 사랑하는 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괴로운 날이다. 별일 아니라고 이거 다 상술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다가도 편의점 계산대 옆 싸구려 종이에 쓰인 “사랑하는 이에게 달콤함을 선물하세요”란 글귀를 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여기까지 쓰고 잠깐 디에디트 사무실을 둘러본다. 메마른 형광등 불빛 아래 하나같이(그래봤자 셋이지만) 푸석한 얼굴을 하고 푸른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다. 분위기도 전환할 겸(?) 푸르딩딩한 사무실에 핑크빛 기운을 불어넣어 보기로 했다. 지령을 내려보자. 만약 당신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면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 무엇을 선물하고 싶은지. 그리고 이건 그 결과다.

우리 모두 반나절을 치열하게 고민하다 결국 자기가 갖고 싶은 걸 가져왔다. 선물이란 본디 상대방의 취향을 고려하는 척하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는 자기만족이다. 자, 누구 선물이 가장 여러분의 마음에 들었는지 댓글로 투표 받습니다! 뿜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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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터치 온더락 글라스 스테인리스 에디션 3만 9,000원”

Editor M: 상상해본다. 가상의 남친이지만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적어도 내 남자라면 추운 겨울 싱글몰트위스키 한 잔 정도는 온더락으로 즐길 줄 아는 취향을 가져야겠지. 혼술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섹시한 잔을 준비했다. 위스키를 부으면 잔 안으로 눈 덮인 설산을 연출할 수 있는 그런 잔이다. 여기에 스테인리스 볼도 함께라면 40도가 넘는 독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찐하게 즐길 수 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의 진짜 밤이 시작된다. 그런데 잠깐, 나랑 같이 마시려면 두 개는 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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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러댄알콜 초콜릿 티 캔들 4만 3,000원”

Editor M: 솔직히 이 나이에 초콜릿 선물은 좀 멋쩍다. 살만 찌는 설탕 덩어리 대신 배러댄알콜의 초콜릿 티캔들을 준비했다. 알콜보다 좋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 브랜드명인가! 오렌지와 시나몬 스틱 그리고 초콜릿의 향기가 뒤섞인 향은 그의 입안에서 진득하게 녹아드는 초콜릿보다 훨씬 더 끈적하게 우리 사이를 채워줄 거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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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 9000시리즈 34만원 대”

Editor H: 최고의 발렌타인 선물을 고르라는 에디터M의 말에 바빠 죽겠는데 반나절을 고민했다. 수많은 후보가 스쳐 지나갔지만 발렌타인엔 로맨틱한 물건이 잘 어울릴 것 같다. 가격은 조금 비싸도 상관없다. 평생을 저금일랑 모르고 지갑 헤프게 살아왔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연인에게 돈을 아낀단 말인가. 선물은 내 기분 좋자고 하는 일인걸. 아무튼 고뇌 끝에 골라온 선물은 바로 전기 면도기. 내 남자에게 최고의 면도기를 선물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면도기는 대부분의 성인남자가 매일같이 쓰는 물건이 아닌가. 아침마다 차가운 금속성의 물건을 얼굴에 문대야 하는 지루한 일과를 조금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고 싶달까.

기왕이면 제일 좋은 모델로 가자. 얼굴에 상처 나는 일없이, 깨끗하고 말끔하게 면도할 수 있도록. 면도기의 생명은 헤드가 목과 턱의 곡선에 따라 얼마나 유연하게 움직이느냐에 달렸다. 8방향 무빙 헤드시스템이 모든 곡면을 커버해줄 정도로 유연해 완벽한 밀착 면도를 가능케 한다고. 첫 번째 날이 수염을 들어올린 뒤 뒤따라오는 두 번째 날이 밀착 커팅해서 훨씬 깨끗한 면도가 가능하다. 직관적인 속도 조절 버튼에 LED 디스플레이로 배터리 잔량을 표시해주는 기능까지. 과하다 싶을 만큼 멋지다. 검색해보니 가격은 34만 원대. 사줄 수 있다. 심지어 직접 면도도 해줄 수 있다. 상상 속의 스윗한 당신이 실제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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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티켓, 가격은 왕복 10만원 정도로 맞춰볼 생각이라고”

Editor G: 나는 굉장히 실용적이면서 센스있는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자면, 기념일도 아니고 생일도 아닌 발렌타인데이까지 선물을 챙기는 건 조금 투머치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게 로맨틱을 기대하는 남자친구가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은 찰나였다.

그에게 제주도 왕복 항공권을 선물하자. 내게 애인이 있다면 따뜻한 그곳, 제주도를 함께 여행하리. 둘이 함께 즐길 수 있어 실용적이고 로맨틱하며 그 어떤 애매한 선물보다 마음에 든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시간을 선물하는 거니까. 그저 내가 떠나고 싶은 것 같다만은 그래도 기왕이면 둘이 좋겠다. 떠나요, 둘이서.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