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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팩 T의 은밀한 사정

오늘 기사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왜 어떤 우유는 상온에 두어도 상하지 않을까?”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방부제를 엄청 때려 넣었겠거니....
오늘 기사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왜 어떤 우유는 상온에 두어도 상하지 않을까?”…

2018. 02. 05

오늘 기사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왜 어떤 우유는 상온에 두어도 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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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방부제를 엄청 때려 넣었겠거니. 그런데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종이팩에 담기기 시작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내건 두유조차 종이팩이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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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보관 없이도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방부제가 아니라 포장의 기술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테트라팩이 있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알고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테트라팩 안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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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종이팩에 담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과거엔 우유를 유리병에 담아 판매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유뿐만 아니라 주스도 그렇다. 어렸을 적 우리 집 물병은 언제나 선키스트 주스병이었다. 혹시 여러분도 그랬을까? 한 손으로 물을 따르는 건 아빠나 할 수 있을 만큼 무거웠다. 그치만 언제부턴가 유리병이 자취를 감췄다. 주스는 종이팩에 담겨 팔렸다. 가볍고, 편리했다. 꾹꾹 접어서 재활용하면 되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유리는 다루기 까다롭다. 무겁고 잘 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세계가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전쟁으로 멍들었던 1940년대. 그때 그 시절 유리는 금처럼 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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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바꿔야 했다. 1943년 루벤 라우싱 박사는 생각한다. 비싸고 위생적이지도 않은 우유병이 대체되어야 할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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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가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온다. 테트라팩의 힌트는 소시지를 만드는 방법에서 나왔다. 종이를 긴 튜브 형태로 만들고 그 안에 내용물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양 끝을 어긋난 직각 모양으로 잘라준다. 테트라팩 클래식 종이팩의 삼각뿔 모양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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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라팩이 재미있는 점은 완성된 용기에 액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포장이 완성되는 것과 내용물을 담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소시지 혹은 순대를 만드는 과정을 상상해 보면 좀 더 감이 올 거다. 공기와 균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내용물과 포장지가 결합되는 방식은 보존기간을 늘리고, 효율성을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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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실은 삼각뿔 모양의 클래식부터 최신 모델까지 형태는 바뀌었을지 몰라도, 테트라팩의 기본적인 원리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온다는 거다. 다만 이걸 실현하는 기계가 훨씬 더 정교하고 빨라졌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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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옛날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한 남자의 집념으로 시작한 테트라팩은 지금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우리 삶과 맞닿아 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 들러 아무 종이팩이나 들고 옆 혹은 아래를 확인해보자. 아마 거의 모든 종이팩에서 테트라팩 로고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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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물을 팩 안에 담기기 전, 균을 죽일 만큼 높은 온도로 올렸다가 바로 식힌다. 이 과정은 맛이나 다른 요소는 변질되지 않으면서 오직 균만 죽이기 때문에 냉장 보관을 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보존이 가능하다. 상온에서도 오랫동안 음료를 보관할 수 있게 하는 ‘아셉틱 기술’은 오늘날 테트라팩을 만든 대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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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테트라팩이 어떻게 생겼다는 거야?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추억의 음료, 피크닉(놀랍게도 이 음료도 테트라팩이다) 뱃속을 갈라봤다.

테트라팩의 기본은 종이다. 여기에 내용물이 새는 것을 막고, 열과 균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 머리카락보다 얇은 알루미늄을 씌운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흔히 페트병에서 볼 수 있는 폴리에틸렌의 얇은 막을 씌워 내구성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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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가볍다,  종이팩 소주부터 코코넛 워터까지 휴대성이 좋아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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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상온에서 보관과 이동이 가능하다는 건, 냉장보관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냉장보관이 필요 없으니,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유통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기업에도 소비자에게도 그리고 환경에도 좋다. 이 삼자를 모두 만족시킬 때, 우리는 이걸 혁신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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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을 지킵니다(Protects What’s Good)’. 테트라팩의 모토다. 그들이 말하는 소중한 것은, 팩 안에 든 내용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친환경 인증의 종결자라고 불리는 ‘가공·유통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 인증을 받았다. 가공은 물론 유통까지 전과정 중에 환경을 파괴하는 만큼 나무를 심는  숲의 목재를 사용한 제품에만 부여하는 인증이다. 결국 테트라팩에 담긴 음료를 사는 건 지구에 나무를 심는 거라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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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자가 없어도 차가 움직이고, 스피커가 내 말을 알아듣고 음식을 주문해주는 시대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는 건, 매일 마시는 우유의 포장 방법을 바꾼 것처럼 작지만 큰 혁신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지금, 테트라팩의 기술과 철학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혁신은 가끔 이렇게 작고 단단한 것부터 시작된다.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