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麥book] 에비스와 하루키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다. 새해엔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그리고 술도 더 열심히 마셔보기로 했다. 이쯤되고 보니 이 두 가지를 같이...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다. 새해엔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그리고 술도 더 열심히…

2018. 01. 30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다. 새해엔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그리고 술도 더 열심히 마셔보기로 했다. 이쯤되고 보니 이 두 가지를 같이 하면 어떨까 싶었다. 좋은 문장은 때때로 가장 맛있는 안주가 된다. 남의 삶을 관음하며 음탕한 액체를 목으로 흘러내리는 건 퍽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물론 책 속 주인공이 홀짝이고 있는 술도 좋겠지만, 주류 전문 에디터의 명예를 걸고 궁합이 좋은 술과 책을 찾아 여러분께 소개해보겠다.

이 시리즈의 이름은 맥북(麥book), 맥주와 책의 짝짓기다. 보리 맥(麥)이 들어가긴 하지만 꼭 맥주에 갇힐 필요는 없지. 날 취하게 만드는 알코올과 좋은 문구가 있다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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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야심찬 시리즈의 첫 번째 타자를 뭘로 하면 좋을까 한참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 내가 즐겁게 읽은 것으로 시작해 보자. 첫 번째 책은 이거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그리고 에비스. 하루키 책을 소개 하면서 위스키를 추천하지 않는 건 퍽 아쉽지만,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이름에 맞게 첫번째는 맥주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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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장편보다는 단편을 그리고 단편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그의 글에선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온 사람에게 느껴지는 올곧은 아우라가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적당한 거리를 달리고 글을 쓴다. 식사는 간단하지만 건강한 것으로. 일본 특유의 정갈한 음식을 맥주와 즐기는 하루키의 삶에는 방탕한 내가 감히 따라할 수도 없는 단정함이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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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을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그의 삼십 년 작가 생활동안 써온 짧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실제로 잡다한 상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이 책이 좋은 건, ‘오늘은 책을 좀 읽어볼까’라며 각 잡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TV가 재미 없군. 뭐 다른거 할 거 없나?’ 이런 느슨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랄까. 퇴근 후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냉장고에서 차가운 에비스 맥주 한 캔을 꺼내왔다면 그걸로 됐다.

잡문집의 첫번째 이야기는 굴튀김으로 시작한다. 파삭거리는 튀김 옷을 헤치면, 몽글한 굴과 짭짤한 바다가 밀려드는 굴튀김. 세상에 당장 먹고 싶다. 침을 줄줄 흘리며 읽어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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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하루키는 삿포로 맥주를 마신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 더 좋은 에비스를 마시기로 한다. 훗.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다. 하지만 내 앞에 맛깔난 굴튀김이 없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영 분하다.

몸을 이불에 파묻은 채로 맥주를 마시며 하루키의 이야기를 듣는다. 피식 웃기도 하고 ‘뭐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지?’ 싶은 것도 있다. 그럴 땐 문장 대신 에비스 한 모금을 넘긴다. 맑고 깨끗하다. 잡맛이 없다. 좋은 궁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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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스는 1890년 시작된 일본의 프리미엄 맥주다. 일본 내에서도 꽤 높은 가격이 형성되어있지만, 다른 나라에 수출이 되지 않아 일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꼭 마셔봐야할 맥주로 꼽기도 한다. 역시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높은 가격에 들어왔다. 한 캔에 3,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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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책을 읽어보자. 이번엔 LP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째 별로 재미가 없다. 난 다시 에비스를 마신다. 홀짝홀짝.

자잘한 탄산은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아무 저항감이 없다. 라거라고는 믿기 힘든 진득한 몰트와 홉의 맛과 향기 탄산과 어우려져 일렁댄다. 다른맥주보다 1.5배 정도 더 길게 숙성을 해서 일까. 깊고 진하다. 목구멍으로 맥주를 넘기자마자 입을 싹 닦는 맛이 아니라, 끈덕지게 혀 끝에 남아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맥주다. 그냥 맥주가 아니라 맛있는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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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안주로서 이 잡문집을 추천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걍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읽는 거다. 읽다가 재미 없는 주제가 나오면 망설이지 말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챕터는 많다.

그리고 흥미로운 구절이 보일 때마다 ‘흠, 흥미롭군’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에비스 한 모금을 마시는 거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아, 여기에 비틀즈의 곡을 클래식으로 바꾼 연주 곡이나 혹은 발끝을 살랑대게 만들 정도의 재즈를 BGM으로 깔아두면 더욱 좋겠다. 이렇게 조금씩 읽다보면 하루키와 술 한 잔 기울인 것 같은 친밀함이 든다. 어때요 하루키씨, 이 정도면 나 오늘 좀 괜찮았나요?

麥book #1. 에비스
Style – 프리미엄 라거
With –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