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먹고, 마시고, 기도하라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에요. 오늘은 간만에 제대로 각잡고 쓰는 맥주 리뷰를 준비했어요. 사실 그동안 몇몇 분들이 댓글을 통해 수도원 맥주 리뷰를...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에요. 오늘은 간만에 제대로 각잡고 쓰는 맥주 리뷰를 준비했어요. 사실…

2017. 12. 05

여러분 안녕 에디터M이에요. 오늘은 간만에 제대로 각잡고 쓰는 맥주 리뷰를 준비했어요. 사실 그동안 몇몇 분들이 댓글을 통해 수도원 맥주 리뷰를 요청해주셨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요… 얘네가 좀 귀한 몸이라 섣불리 손대지 못하고 있었지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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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마트도 맥주 라인업이 넘나 훌륭해요]

그러다 얼마 전 디에디트 법카를 들고 이마트에 갔을 때 에디터H몰래 카트에 담아 봤어요. 에디터H는 왜 별로 산 게 없는데 30만원이나 나왔냐며 어리둥절 했지만, 그녀에게 맥주 값만 거의 십만원 가까이 썼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더라고요(다른 맥주도 잔뜩 담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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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제자리는 이렇게 맥주가 잘 어울려요]

어쨌든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불리는 이 수도원 맥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해요. 오늘은 에디터H 대신 제가 수다스러운 설명충이 되어 역사 이야기를 잠깐 해볼게요.

Processed with VSCO with a3 preset[왜 이렇게 무서운 이미지 밖에 없을까요…]

일단 트라피스트 맥주는 트라피스트회, 그러니까 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를 말해요. 그럼 트라피스트가 무엇이냐. 한 마디로 기도, 침묵 등을 강조하는 엄격한 수도회를 말해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 유럽의 외딴 시골, 치렁치렁하게 긴 옷을 입고, 곱게 모은 두 손과 앙 다문 입술로 신앙을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요.

그런데 도대체 왜 수도사들이 맥주를 만들었을까요? 

이 트라피스회의 모토는 간단해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아니라 “기도하고 일하라”죠. 이들은 엄격한 공동체 생활 규칙을 따르며 신을 섬기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이랍니다. 수도사들은 육체노동을 일종의 수행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농작물을 기르고 남은 농작물로 치즈나, 맥주를 만들었어요. 또 있어요. 당시 수도원은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이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종교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답니다. 왕부터 학자까지 수많은 방문객을 대접하기 위해서 술 만한게 어디 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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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맥주 칼로리가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거 다들 알고 계시죠? 많이 마시면 살쪄요. 저처럼요. 특히 이 수도원 맥주의 경우 보리(몰트)의 비중이 엄청 높거든요. 수도사들은 금식을 해야하는 사순절 기간동안 밥 대신 곡물로 만든 이 맥주를 마셔 영양을 공급하기도 했대요. 밥은 안되는데, 술은 괜찮았나봐요. 이상하죠? 그래서 이 트라피스트 맥주에는 ‘액체 빵’이라는 별명도 있답니다. 일반 맥주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훨씬 높은 맥주를 빈속에 마셨으니 어쩌면 수도사들은 내내 취한 상태로 기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앗, 이거 신성모독인가요? 그렇다면 비밀로 해주세요.

여러분, 근데 그거 아세요?

공식적으로 트라피스트 맥주는 전 세계 딱 11개 밖에 없대요. 이건 여기 인증마크로 확인 할 수 있는데요, 이 육각형 마크가 없으면 엄밀히 말해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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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이후, 갑자가 이 트라피스트 맥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장사가 잘 되니까 수많은 양조장이 너도나도 수도원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죠. 종교랑 아무 관계가 없으면서 종교적 이미지를 가져다 쓰고, 수도원인척 하기 시작했어요. 이걸 본 수도사들이 화가 나요 안 나요? 결국 1997년 8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뭉쳐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를 만듭니다. 여기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인증을 받아야만 저 마크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트라피스트 맥주는 사실 맥주의 스타일이라고 보는 것보다 일종의 지역 특산물 인증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인증 마크가 없이, 그냥 상업 양조장에서 만든 수도원 스타일의 맥주는 에비에일(Abbey ale)이라고 불러요. 그렇다고 이 에비에일이 절대 불법이라거나, 맛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단지 인증을 못 받았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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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트라피스트 맥주에 대한 배경설명은 이정도면 충분한 것 같으니 오늘 리뷰할 트라피스트 로슈포르(Trappistes Rochefort)에 대해 설명을 시작해볼까요? 이 맥주는 수도원 맥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맥주랍니다. 1595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니 무려 40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죠. 그 다음으로 오래된 수도원 맥주가 1836년이니까, 로슈포르는 수도원 맥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수도원 맥주의 단군할아버지 격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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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욕심쟁이니까 트라피스트 로슈포르 세 가지를 모두 가져왔어요. 요즘에야 그리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지만, 사실은 워낙 귀한 술이라구요. 파랑 병뚜껑의 10번의 경우 마트 가격만 거의 만 원이에요. 에디터H한테는 말해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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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기에 번호를 붙여 볼까요. 6번, 8번, 그리고 10번 이렇게요. 세 가지 모두 수도원 안의 우물물을 사용했대요. 우물이라니 참 정겹죠. 그러니까 이 맥주를 마시면 벨기에의 몇 백년 전통의 우물물을 마실 수 있는거에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꿀꺽꿀꺽. 아, 수도원 내부도 그렇고 양조장 내부도 공개하지 않는게 원칙이라고 하니, 정말 아직도 우물물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마셔보기로 해요.

Processed with VSCO with av8 preset[왼쪽부터 6번, 8번, 10번]

6,8,10은 모두 동일한 재료를 사용해요. 하지만, 숙성기간과 재료의 비율이 달라요. 그래서 색도 번호가 높을수록 진해진답니다. 그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건 바로 알코올 도수죠. 6번이 7.5% 8번이 9.2% 10번은11.3%. 취하지 않게 조심하는게 좋겠어요. 번호가 제일 높으면 도수가 높고 가격도 세고 맛도 좋아요. 그러니까 10번이 제일 좋은 거죠. 10은 저명한 맥주 아카이브 레이트비어에서 100점을 받았을 정도니. 이 정도면 트라피스트 맥주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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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걸 먼저 마시면 입맛을 버릴 수 있으니, 6번부터 마셔보기로 해요. 숙성기간이 가장 짧으니까 일종의 막내라고 볼수도 있겠네요. 가장 색이 연하고 맛도 생생한 6번은 꽤 향긋합니다. 이렇게 좋은 맥주는 벌컥벌컥 마시기 보다는 입에 가만히 머금으며 음미하는 것이 좋아요. 독하니까요. 아주 조금만 입에 머금고 가만히있으면 안개처럼 입안에서 퍼지는 맛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체리처럼 달콤하고 살짝 새큼한 맛도 느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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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맥주는 너무 낮은 온도에서 마시면 오히려 맛이 차가운 온도에 갇힐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없어요. 라벨에도 12도에서 14도로 즐기라고 적혀있답니다. 그리고 워낙 향이 좋으니 잔도 향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고블잔이 좋아요. 와인잔처럼 둥글지만, 가지가 굵고 짧은 잔을 말해요. 전 없어서 그냥 일반 맥주잔에 마셨어요. 괜찮아요. 맛만 좋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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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어중간한 8번을 마셔볼거에요. 역시 좀더 진한 맛입니다. 6번에게 이제 막 스물이 된 푸릇함이 있다면, 8번은 삼십대의 농염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마치 저처럼요. 아아, 전 좀 취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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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트라피스트 맥주가 맥주의 종류가 아니라 일종의 인증마크 같은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묶을 수 있는 특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일단 병 안에서 2차 발효가 일어난다는 게 그 첫 번째구요, 두번째는 맥주의 거품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품 덕분에 똑같은 맥주의 맛을 즐길 수 있죠. 성긴 것 처럼 보여도 아이스크림처럼 봉긋하게 올라온 포근한 거품을 음뇸뇸 즐기다보면, 어느새 취하곤 하죠. 도수가 높은 편인데도 천근만근 무거운 바디감이 아니라 즐겁게 마실 수 있어요. 아, 라거처럼 가볍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따로 안주가 필요 없을만큼 풍부한 맛을 지니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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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로슈르포의 맏형 10번이죠. 6번도 8번도 좋지만 숙성도가 좋은 10번은 수도원 맥주의 투쁠러스. 다른 애들이 fine 이라면 10번은 finest. 최상급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일단 색이 엄청엄청 진해요. 아주 약간의 붉은 빛이 도는 가죽처럼 보이기도 하도, 윤기가 촤르륵 도는 야생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해요. 아름다워요.

마실수록 입에 착착감겨요. 뭐랄까 너무 많은 맛의 층위를 담고 있어서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요? 처음 먹었을땐 그냥 진득하다고만 느껴질 수 있는데 저를 믿고 눈을 감고 다시 한 모금 더 즐겨보세요. 붉은 빛이 도는 융단처럼 달콤하고 진득한 맛이 내 혀를 휘감다가 알콜향과 함께 고수 등 강한 향이 휘몰아 칩니다. 음 이건 말이죠.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본 뒤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惑)의 맛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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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H는 이 트라피스트 로슈포르를 이렇게 평가하네요. 가난한 자들의 위스키. 맞아요. 이게 딱 한 입만 마셔도 몸이 후끈 달아오르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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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공식적으로 저는 취했습니다. 하지만 즐겁네요. 맛있는 맥주는 언제나 즐거워요. 여러분 요즘처럼 추운 날씨엔 이렇게 강력한 맥주 한 잔 딱 마시고 따듯한 전기 장판 위에서 자면 그것이 바로 행복아닌가요. 전 이제 조용히 잠을 청하렵니다. 창피하지만, 전 취하면 일단 자거든요. 여러분 모두 굿나잇.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