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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고래의 꿈

선택할 게 많을 수록 나에게 더 큰 자유가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유가 때때로...
선택할 게 많을 수록 나에게 더 큰 자유가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2017. 11. 24

선택할 게 많을 수록 나에게 더 큰 자유가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무한한 자유가 때때로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게된 건 좀 더 나이가 들고 난 뒤다.

Processed with VSCO with fp4 preset[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이거다. 요즘 마트 안 맥주 코너 앞에 설 때마다 길잃은 아이처럼 참담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맥주 앞에서 작아지는 나. 증식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쪽수가 늘어나는 수입 맥주들. 아, 현기증! 뭘 마시지? 이것도 저것도 다 맛있어 보이잖아. 솔직히 그동안 많은 맥주를 마시고, 또 공부해 왔지만 세상은 넓고 맥주는 너무 많다. 현란한 라벨만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기란 넘나 어려운 것. 누가 딱 골라서 이걸 마시라고 말해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띵동~”

며칠 전 사무실로 검은  박스가 도착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내 집 안방에서 편하게 맥주와 안주를 받아볼 수 있는 맥주 정기배송 서비스 벨루가(veluga)다. 마트와 편의점에서 그 많은 선택의 시간과 실패의 기회를 지나 나에게 배달된 맥주. 신난다. 헤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고, 비록 지금은 업무 시간 이지만 이건 리뷰니까. 핑계가 좋았다. 일단 박스를 뜯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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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보이는건 인장으로 봉인된 편지다. 카드 접어 봉투에 넣고 정성껏 밀랍을 녹인 후, 벨루가의 로고가 새겨진 인장을 꾹 눌렀을 그 과정을 상상 하니 마음이 간지럽다. 마치 비밀 클럽의 회원이 된 기분. 누군가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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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호들갑 떨고 침착하게 벨루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 벨루가는 한 달에 두 번 야식과 함께 맥주를 정기 배달 해주는 서비스다. 한 번 건너뛴 목요일 마다 우리는 비어 마스터가 고심해 고른 2종류의 맥주를 2병씩 받아볼 수 있다. 가격은 한 달에 6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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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주는 맥앤치즈와 브루스게타. 이렇게 만드는 데 5분이 미처 걸리지 않았다. 맥앤치즈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바게트를 꺼내 그 위에 토마토와 버섯을 올려놨다. 아주 손쉬운 플레이팅인데 꽤 그럴싸하다.

Processed with VSCO with fp8 preset[성급한 막내 에디터의 못된 손, 부르스게타를 두개나 집어 들었다]

솔직히 배달된 음식인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맛있다! 치즈가 쭉쭉 늘어나는 맥앤치즈는 짭짤한 맛이 맥주 안주로 그만이었다. 바삭한 바게트 위에 풍미 좋은 버섯과 감칠맛 폭발하는 토마토를 올린 부르스게타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먹었다. 함께 온 맥주와 궁합도 원더풀. 덕분에 디에디트 사무실에서는 조촐한 맥주 파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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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맥주를 볼까? 이번에 배달된 맥주는 저 멀리 캄보디아와 미국의 시애틀에서 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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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캄보디아에서 온 앙코르(Angkor) 맥주부터. 캄보디아 맥주는 처음 마셔본다. 그런데 캄보디아의 자랑, 앙코르 와트에서 이름을 딴 맥주라니. 우리나라로 치면 맥주 이름이 불국사 정도 되는걸까? 캄보디아 사람들은 행복지수가 엄청 높다는데, 행복한 사람들이 마시는 맥주는 당연히 맛있겠지? 일단 오프너 없이 딸 수 있는 구조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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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앙코르 엑스트라 스타우트. 이름에 괜히 ‘엑스트라’가 붙는 게 아니다. 알코올 도수가 무려 8도. 컵에 따르면 벨벳처럼 부드러운 거품이 올라온다. 무시무시한 도수에 반해 쓴맛은 약한 편. 오히려 혀에 착 붙는 단맛이 먼저 느껴진다. 마지막에 약한 신맛이 치고 올라오는데, 탄산이 강하지 않아서 진득하게 넘어간다. 아주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기분. 크으. 이런게 바로 큐레이션의 미학이지. 예전의 나라면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완전 새로운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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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한 정보는 상당 부분 동봉된 카드에서 얻을 수 있다. 간단하게 맥주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어 맥주를 홀짝이면서 보기 좋더라. 아, 이게 이런 맥주구나. 이 맛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는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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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은 레드훅의 롱해머 IPA. 사실 레드훅은 워낙 유명한 양조장이라 이미 알고 있는 곳이다. 다만, 아직 마셔보지는 못했다. 1981년 시애틀에서 시작한 레드훅은  뭐랄까 크래프트 맥주의 단군 할아버지 같은 브루어리다.

병모양이 아주 독특하다. 몸이 통통하고 주둥이가 짧은게 꼭 박카스 같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니 에디터H는 스리라차, 막내 에디터는 소독약 통 같다고 했다. 아무튼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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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해머 IPA는 레드훅의 대표적인 맥주다. IPA치고 색은 상당히 맑은 편. 맛도 상쾌하다. 진한 홉의 향, 그리고 자몽의 상큼한 향도 느낄 수 있다. IPA치고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서 대낮에 마시기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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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이었다. 대낮에 사무실에서 세 여자가 술과 안주를 사이에 두고 취기가 올라 벌개진 얼굴로 베실베실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은 언제나 우리를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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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벨루가는 단순히 맥주를 배달하는 서비스보다 좀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기 배송 서비스를 신청하고 멤버가 되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파티에 참여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맥주를 구매한 병 수만큼 물부족 국가에 물을 기부하기도 한다. 맥주 정보가 적혀진 카드에는 QR코드를 통해 맥주와 어울리는 음악이 함께 배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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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를 조금 물리치고 한 달에 두번 맥주를 받아 볼 수 있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말이지, 벨루가의 핵심은 맥주를 내 집에서 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한 달에 두 번 내 곁으로 오는 이 서프라이즈 선물은 맛있는 맥주를 마신다는 경험 그 자체를 선물하는 걸지도. 별처럼 많은 맥주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 없다는 것 그리고, 맛있는 맥주와 함께 좋은 경험을 선물받을 수 있다는것. 이게 바로 벨루가꾸는 고래의 꿈이 아닐까. 두근두근. 벌써 다음 박스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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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