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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램지와 카스

내 맥주의 시작엔 카스와 하이트가 있었다. 심지어 병맥도 아니었다. 싸고 양이 많아야 했으니까. 캔이나 페트병에 담겨진 노란 액체를 마시고 취했다....
내 맥주의 시작엔 카스와 하이트가 있었다. 심지어 병맥도 아니었다. 싸고 양이 많아야…

2017. 11. 22

내 맥주의 시작엔 카스와 하이트가 있었다. 심지어 병맥도 아니었다. 싸고 양이 많아야 했으니까. 캔이나 페트병에 담겨진 노란 액체를 마시고 취했다. 곤궁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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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쉐프 중 하나인 고든램지가 카스 광고를 찍었다. 꿀꺽꿀꺽 카스를 넘기고 캬!하며 콧잔등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고든 램지 한국 사람 다됐네.

우리는 혼란스럽다. 한국 맥주가 맛이 없다는 건, 더 이상 논쟁할 필요도 없는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맛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잔혹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가 카스 광고를 찍다니. 그것도 맛있다니! 혹자는 고든 램지가 자본주의에 굴복했다고 비아냥댔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며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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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래? 정말 카스가 맛있나?

결론적으로 카스의 마케팅은 성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의점에 들러 카스를 집어들었다. 크으. 목을 공격하는 강한 탄산. IPA가 4K 디스플레이라면, 카스는 8비트. 단순한 맛. 그리고 아릿하게 올라오는 쇠냄새까지. 그래. 맞아. 이 맛이었지. 나에게 카스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익숙하고 친근한 그런 맛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특히 나와 같거나 그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면 카스 맛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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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램지는 정말 돈 때문에 카스 광고를 찍었을까?

호기심이 들어 찾아봤다. 에일의 본고장 영국에서 온 고든 램지(정확히 말하면 스코틀랜드지만)는 원래 밀레, 버드와이저처럼 깨끗하고 다소 심심한 맛의 페일 라거를 좋아한단다. 페일 라거가 뭔지 궁금하다면, 이기사를 읽어보자. 상대적으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페일 라거는 있는 듯 없는 듯 어떤 안주와도 궁합이 좋은 편이다. 특히 맵고 짜고, 달고, 마늘, 간장 젓갈 등 양념이 많은 한식에 사실 페일 라거보다 더 좋은 맥주는 없다. 그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제 고든 램지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카스가 과연 맛있는 페일 라거냐에 대한 문제가 남았다

우리의 미각은 엄마로부터 온다. 맛이란 것은 상당 부분 후천적이다. 우리는 모두 엄마의 입맛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맛이든 처음 접한 그게 바로 기준점이 된다. 나의 첫 맥주가 카스(혹은 하이트)였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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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카스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 있다. 지글지글 기름이 넘쳐 흐르는 곱창을 구우며(누군가는 소주라고 말할테지만 난 소주를 잘 못마신다), 새우깡과 육포를 까고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을때, 바삭하게 튀겨진 옛날 통닭 앞에서 “이모 카스 하나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엇을 찾겠는가.

그리하여…

맛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같은 음식을 두고 누구는 짜다고, 또 누구는 삼삼하다고 할 수 있다. 맛이 있고 없음은 때때로 상대적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우래옥을 찾았다. 평냉=미식이란 공식이 한국을 휩쓸고 지나간 후 가끔 평양냉면 식당에서는 껄끄러운 장면을 마주친다. “평냉은 말야, 역시 xx면옥이잘한단 말야.” “맛없다고? 쯔. 아직 초딩입맛이네.” 테이블 어귀마다 맛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선비들이 앉아있다. 아아 적어도 맛에 있어서 만큼은 불편러는 너무 피곤하다.

모든 것이 음미해야 하는 맛과 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얻은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진실은 이 세상은 절대로 흑과 백이 아니라는 것. 삶은 복잡하다. 그런데 굳이 맛까지 복잡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음식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지만, 그냥 편하고 익숙한 맛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는 걸. 하루 세 끼 미슐랭 별을 받은 접시만 음미할 순 없다. 때로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3분만에 내 앞에 나타난 인스턴트가 당기는 게 우리네 인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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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더 솔직해져 볼까? 난 고든 램지의 카스 광고 출연이 기쁘다. 일종의 면죄부를 얻은 기분. 난 카스 좋은데?라고 말해보자. 괜찮다. 나에겐 고든 램지가 있으니까.

뭐가 됐든 즐겁게 마시면 그만이다

이 두서없는 글이 국내 맥주 회사를 옹호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맥주를 만든 대기업이 아니라, 매일 바쁘게 일하고 한 잔 마시는 낙으로 사는 우리를 위해 쓰는 글이다. 거의 10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 땅의 맥주는 하이트 아니면 카스였다.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고 비아냥 대기 보다는 지독히 게을렀다고 말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결같이 라거(정확히 말하면 아메리칸 페일 라거)만 조지는(?) 그들은 왜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맥주를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맥주를 소비하는 우리의 입맛이 후진거라고 매도해서는 곤란하다. 닭갈비, 곱창, 삼겹살집에도 오직 라거만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마셨을 뿐이다. 흥겹고 거나하게!

이 글의 결론은 이거다. 누구에게나 무엇이 맛없다고 할 자유는 있다. 동시에 어떤 것이 맛있다고 할 자유 또한 있다. 자칫 양비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정말 그런 걸. 진짜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뭘 마시든 제 취향입니다. 취존 플리즈~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